17세기 가족사를 보는 의의
‘가족’은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 가족 또한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기 때문인데, 호주제 폐지 논쟁이나 이혼과 재혼의 증가 등이 그 변화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이혼과 재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편부모 가정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가족에 대한 이런 식의 편견이 형성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가족사’이다. 특히 17세기는 한국 가족사에 있어 커다란 변혁기로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그러나 전통 시대 가족사는 자료 부족을 이유로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근현대 가족사에 관한 연구 저서도 거의 없다. 특히 가족사를 갈등적 측면에서 고찰한 연구서는 더더욱 없으며,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한 책은 전무한 상황이다. 이제는 우리의 전통 가족사를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향랑 사건을 통해 가족사를 갈등적 측면에서 새롭게 고찰하고자 하였다.
향랑, 그녀는 누구인가?
향랑은 17세기 후반을 살다가 18세기로 접어든 숙종 28년(1702)에 자결한 여인이다. 18세기 여러 문인들은 전형적인 열녀담의 형식으로 향랑의 자결을 형상화했는데, 이로 인해 향랑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열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향랑은 여느 양반 계층의 열녀들처럼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여인이 아니었다. 또한 다소곳하고 얌전하게 자신을 죽이고 살았던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던 서민층의 평범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렇듯 평범한 여인이었던 향랑이 왜 자결을 하게 되었을까?
향랑은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임천순의 아들 칠봉과 혼인을 했는데, 칠봉은 향랑을 미워하여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그 폭력을 견디다 못한 향랑은 칠봉과 갈라서고 친정으로 돌아오지만 친정 부모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숙부 집에 몸의 의탁하나, 숙부가 개가하기를 요구하자 향랑은 이를 거부하고 다시 시댁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시아버지 또한 그녀에게 개가를 권유하며 받아주지 않는다. 개가를 원치 않았던 향랑은 자결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녀의 자결은 자신의 의지가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노래 <산유화>에 담긴 뜻은?
<산유화>는 백제시대 부여 지방의 민요로, 백제 망국의 한을 담은 노래였다.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산유화는 전래되면서 그 슬프고 처량한 음조에 조금씩 다른 가사를 얹어 불렀다고 하는데, 향랑 또한 이 음조에 자신의 오갈 데 없는 비극적 처지를 담아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향랑의 <산유화>는 자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한 맺힌 인생사를 상징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이야기로 풀어보는 미시사, 가족사
이 책의 저자 정창권은 이전의 저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적 글쓰기’를 시도한 바 있다. 이번 책 또한 이와 같은 글쓰기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저자가 이러한 글쓰기를 행하는 이유는 ‘스토리, 곧 이야기는 복잡한 현상을 간단하고 즐거운 방법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직접적이고 논리적인 글에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전체 내용을 이야기체로 전개하면서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설명체로 전달하는 ‘픽션-논픽션-픽션’의 형태에 액자구조를 취하여, 향랑 사건의 첫 기록자인 조구상을 통해 이 사건을 시작하고 끝맺도록 구성하였다.
주목할 만한 내용
*왜 17세기 가족사인가?
17세기는 한국 가족사에서 커다란 변혁기였다. 실제로 16세기인 조선 중기에는 장가와 처가살이 혹은 남귀여가가 보편적이어서, 가족관계에 있어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았고, 친족관계에서 외손과 본손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재산도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상속받았고, 조상의 제사도 서로 돌려가며 지내는 윤회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가족제도가 부계 적장자 위주로 변하였고, 친족제도도 모계와 처계를 배제한 부계만으로 한정되었다. 혼인제도 역시 친영과 시집살이로 바뀌었으며, 재산상속도 점차 아들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향랑의 자살 사건은 바로 이러한 17세기 가족사의 변화, 곧 완고한 가부장제의 정착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은 17세기 중반의 장화, 홍련 살해 사건과 함께 조선 후기에 발생한 매우 충격적인 가족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에는 계모 문제나 가정폭력, 이혼, 재혼 등 가족 내의 갈등적 측면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향랑의 일생을 쫓아가면서 당시 가족사와 서민 가정의 생활문화를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계모는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향랑 사건을 기록한 문인들은 한결같이 향랑의 계모를 여타 조선 후기 계모형 고소설에 등장하는 계모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향랑의 계모는 조선 후기 완고한 가부장제의 또다른 희생자에 불과한데, 고려시대나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계모의 지위가 보장되었을 뿐 아니라 적자와 의자 사이에 법제적으로 차등을 둔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혈연주의의 강화, 여성의 지위 하락, 가부장적인 지식인들의 왜곡된 발언 등으로 계모는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향랑의 계모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악인으로 묘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사실 일반적인 당시의 어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문인들은 향랑을 열녀로 확실히 부각시키기 위해 계모를 악인으로 몰아붙여야 했던 것이다.
*부부싸움 - 외도 - 가정폭력의 상관관계
옛날 사람들도 과연 부부싸움을 했을까? 만약 했다면 주로 무엇 때문에 싸웠을까? 가장 일상적으로 부부가 싸움을 한 것은 남편이 살림이나 자녀교육 같은 가사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심한 부부싸움을 벌인 경우는 역시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는데, 조선 전기 <묵재일기>를 쓴 이문건의 경우 기녀를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부인과 크게 싸움을 벌여, 부인의 말에 따라 기녀를 멀리하게 된다. 또한 중종 때 있었던 ‘이형간 사건’이나 ‘홍언필 사건’, ‘신수린 사건’ 등은 남편이 외도를 하여 부인과 크게 싸우고 쫓겨난 사건들이다. 이와 같이 조선 전?중기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남편이 외도를 하면 그저 바라보며 체념하지 않았으며, 이들의 싸움 또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반적으로 남편의 아내구타인 ‘가정폭력’ 또한 외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조선 중기까지는 남편이 외도를 하면서 아내에게 폭력까지 행사한 예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아내의 남편구타, 다시 말해서 ‘매맞는 남자들’이 문제될 정도였는데, <태평한화골계전>에 실린 조관 허모의 경우나 <천예록>의 ‘아내에게 종아리를 맞은 성하길’, ‘아내에게 수염을 잘린 우상중’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인 조선 후기에 이르자 남성 위주의 완고한 가부장제가 정착하면서 가부장적 가정폭력, 곧 ‘남편의 아내구타’가 본격적으로 문제시되기 시작한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가정폭력의 사례는 <이춘풍전>이나 <봉산탈춤>에 잘 나타나 있으며, 향랑의 남편 칠봉의 아내구타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칠봉은 이 책에서 ‘삼월이’로 설정된 여자와의 외도 때문에 향랑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언제부터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백안시되었을까
고려시대만 해도 남녀간의 이합이 비교적 자유로워, 성종비나 충숙왕비와 같이 이혼한 여인이 국왕의 배필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이혼이나 재혼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니어서 남편의 출세길이 늦어지자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한 여성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유독 여성의 이혼과 재혼을 죄악시하는 풍토가 생기는데, 이 시기엔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여자는 무조건 출가해서 시집의 대(代)를 이을 자식(아들)을 낳아 며느리로서 할 도리를 다해야지, 그렇지 않고 중간에 혼인을 파하고 돌아오면 그 자신은 물론 친정 부모와 조상까지 욕을 먹인다고 여겼다. 또한 성종은 이른바 ‘재가금지법’을 제정하여 여성의 재혼을 규제하기 시작했으며, 열녀 표창, 곧 재혼하지 않은 여자를 표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수절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이혼과 재혼을 부정시?금기시하는 인식이 크게 확산되었고,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여성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저마다 수절하거나, 심지어 남편에게 절의를 지켜 자살까지 감행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즉,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힘들어지고, 백안시하는 풍토가 형성된 것은 사실 가부장제가 정착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였던 것이다.
*열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열녀’는 언제부터 존재한 것일까. 고려시대나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성의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절개(정절)를 지키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7세기를 기점으로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여성들은 ‘일부종사’를 강요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열녀 또한 이러한 조선 후기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즉 조선 후기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열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향랑도 남편과 갈라선 뒤 ‘개가를 거부’하고 ‘자결’했다는 그 결과만으로 조구상을 비롯한 당시 문인들에 의해 열녀(烈女)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녀는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향랑에게 개가란 칠봉과의 불행했던 혼인 생활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조선 후기의 가부장적 분위기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향랑은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자결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향랑의 예로 볼 때, 열녀담에 대해서도 한번쯤 발상을 전화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열녀라고 하면 무조건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여인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지만, 그녀들 또한 실제로는 여느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억척스럽게 현실을 살아낸 여성들이었다. 또한 향랑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양반들이 개인적인 치적을 위해, 혹은 가부장제를 강화하기 위해 열녀로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측면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암흑기에도 여성사는 살아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여성들의 자유로운 활동상이 나름대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여성예술가가 계속해서 출현하기도 했던, 상대적으로 열린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여성들은 오직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가문보조자로서의 역할만을 요구받았다. 안동 김씨가 대표적인 예인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이해력도 탁월했지만, 오진주와 혼인한 뒤로는 손에서 책을 놓아야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에 그러한 처지의 여성들이 소설을 중심으로 활발한 문예활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소현성록>, <옥원재합기연> 연작, <완월회맹연> 등의 ‘국문장편소설’이 그 예이다.
그리고 전 사회계층에 남존여비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향랑과 같은 서민층 여성도 많은 희생을 당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을 자기주장이라고는 전혀 내세우지 못했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여인이라고만 평가해선 안된다. 서민층 여성들은 향랑과 같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 자신들도 분명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임을 명백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정창권(鄭昌權)은 고려대와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고려대 강사 및 동 대학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고, 한국여성문학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미시적 관점으로 전통시대 여성?장애인?노인?어린이?하층민 등 주변인의 생활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그것을 널리 알리는 문화콘텐츠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국문 장편소설과 여성?, ?일기를 통한 우리 생활사 엿보기? 등이 있고, 저서로는 『한국 고전여성소설의 재발견』(2002),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2003)가 있다.
1. 들어가기에 앞서
17세기 조선의 가정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향랑 사건으로 본 17세기 서민층의 가족생활사
2. 절의의 고장, 선산
선산 부사 조구상
추로지향(鄒魯之鄕)
남면 약정의 보고서
3. 계모, 또다른 희생자
생기발랄한 소녀
계모는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가
억척스런 여인
4. 가까스로 치룬 혼인식
원치 않은 결혼
세계적 대재난, 을병대기근
신행길
5. 가정폭력의 기원
원한만 쌓는 관계
외도?부부싸움?가정폭력의 법칙
파국
6. 이혼한 여자
집안 망신
이혼이 언제부터 백안시되었을까
7. 재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막다른 길
여성 재혼의 역사
산유화(山有花)
8. 자결 이후
열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9. 맺음말
암흑기에도 여성사는 살아 있었다
동아일보: 향랑, 산유화로 지다’…열녀, 여자를 두번 죽이는 이름
조선 숙종 28년(1702) 경상도 선산부 상형곡(현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서 양인(良人) 출신의 한 여인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의 슬하에서 자란 향랑(香娘)이란 이름의 이 여인은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14세의 칠봉에게 출가했다. 남편 칠봉은 외도를 하면서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향랑은 결국 3년 만에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친정 부모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숙부에게 찾아가 의탁했지만 숙부도 얼마 후 그에게 개가를 종용했고, 향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시댁을 찾아갔다. 그러나 남편의 횡포는 여전했고 이번엔 시아버지까지 개가를 권유했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그는 낙동강의 지류인 오태강으로 가서 나무하는 한 소녀를 만나 자신의 기구한 인생사를 이야기하고 ‘산유화(山有花)’란 노래를 부른 뒤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선산부사는 향랑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며 그를 열녀로 중앙정부에 추천했고, 2년 뒤에 드디어 임금은 향랑을 ‘정녀(貞女)’라 부르고 그 무덤 옆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향랑은 시골의 무식한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를 알아 죽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고 또 죽음을 명백히 하였으니, 비록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수록된 열녀라도 이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었다.
향랑은 열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18, 19세기의 문인들은 전(傳), 한시, 소설, 잡록 등 20여 편의 작품으로 향랑의 삶을 기록했다. 이 ‘열녀’의 무덤은 현재 경북 구미시 형곡동 산 21번지에 있는데, 그가 자결한 음력 9월 6일이면 매년 그의 묘 앞에서 묘제(墓祭)가 열린다.
저자(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국문학)는 “향랑은 열녀가 아니라 18세기경 가부장제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하며 이 여인의 자살사건을 다시 추적해 간다.
그에 따르면 향랑은 무조건 남편에게 다소곳하게 순종했던 여인이 아니라 억척스럽게 현실을 살아낸 여인이었다. 그는 외도를 하며 폭력까지 일삼는 남편과 맞서다가 이혼을 한 뒤, 이혼한 여자를 천시하는 풍습이 자리 잡아 가던 18세기 초 조선의 현실에서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처가살이가 일반화돼 있었고 남녀가 논밭에서 동등하게 노동했던 조선 초까지는 부부관계나 재산 상속, 이혼과 재혼 등의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의 지위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표방한 조선이 건국된 뒤 15, 16세기에 성리학적 가족제도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고,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36) 이후 지배층이 예학(禮學)을 강조하며 무너진 사회체제 회복을 시도하면서 완고한 가부장제가 확립돼 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혼과 재혼, 외도와 가정폭력 등의 문제를 파헤쳐 가며 가부장제가 18세기라는 역사의 한 시기에 만들어진 산물임을 밝혀 간다.
가부장제의 허상과 폐해를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너무 앞서가다 보니 ‘향랑’을 둘러싼 픽션과 논픽션, 주장과 사실이 혼동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21세기 한국사회의 가족제를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김형찬기자(2004.6.5)
조선일보 : 한 여인의 삶으로 본 17세기 가족사
이 책은 향랑이라는 한 여인의 자살 사건을 토대로 17세기 가족사를 조명한다. 딱딱하고 개념적인 역사서술을 지양하고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이란 미시적 사건 속에 당시의 사회상을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전통시대 여성과 장애인 노인 어린이 하층민 등 주로 주변인들의 생활사를 연구해 왔으며 이 책은 그 연구의 한 성과다.
우리는 이혼과 재혼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런 시각은 한국 가족사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 17세기쯤에야 주류 정서로 자리잡게 된다. 저자가 향랑 자살사건을 주목한 것도 이 때문. 향랑은 17세에 같은 마을 총각과 혼인을 하지만 남편이 미워하며 폭력을 휘두르자 시댁을 나선다. 그러나 친정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고 몸을 의탁한 숙부는 개가를 권한다. 개가하기 싫어 다시 찾아간 시댁마저 그녀를 외면하자 향랑은 목숨을 끊는다.
저자는 이 사건 속에서 계모가 악녀로 묘사된 것은 가부장제하에 향랑을 열녀로 둔갑시키려는 사대부들의 음모 때문이었고, 외도하던 남편이 향랑을 폭행한 것도 조선중기라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조선 후기 여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열악해지고 있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역사책인데도 향랑과 계모가 다투는 대사가 등장하는 등 마치 옛날 이야기처럼 꾸며 놓는 등 대중적 독서를 위한 배려가 느껴지는 책이다.-김태훈기자(2004.6.5)
중앙일보 : 향랑은 정말 열녀였는가?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한국판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다. 미시사(微視史)의 이 고전이 16세기 프랑스의 작은 시골에서 있었던 가짜 남편 소동을 토대로 당시 민중의 삶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면, 『향랑, 산유화로 지다』역시 그렇다. 18세기 초 자결한 한 시골 여인의 삶과 죽음을 소재로 당시 가족사까지를 복원하기 때문이다. 조선 중후기 부부 간 이혼과 재혼 문제, 가정 내 폭력 문제도 규명된다.
따라서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요즘 뜨고있는 미시사 혹은 신(新)문화사 분야의 열매로 평가된다. 미시사란 기존의 정치사·경제사와 또 달리 당시 민중의 삶을 규명하되, 문헌 자료에 큰 구애를 받지 않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주인공은 숙종28년(1702년) 자결한 보통여인 향랑.
알고 보면 이 여성은 18세기 당시부터 유명인물로 떴다. 『열녀 향랑전』등 6종의 전기물, 요즘 유명해진 이덕무 등이 쓴 10여개의 한시 등이 ‘열녀 찬가’를 불렀다. 저자는 묻는다. 향랑이 과연 전형적인 열녀일까? 혹시 그는 권위주의를 강화해가던 조선 사회의 피해자는 아닐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면서 저자는 ‘향랑 구출하기’의 모험을 벌인다.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스럽다. 당시 남성중심주의로 방향을 틀어가던 조선조 사회에서 향랑이 겪었을 괴로움과 고통도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의 접근이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향랑의 삶을 통해 17세기말 조선시대 가정의 삶을 복원하려했다는 시도는 평가할만한 요소다.
이를 테면 향랑은 계모의 손에 자랐다. 문제는 ‘악독한 계모’란 알고 보면 완고한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조선조 중후기의 특징. 중기까지만 해도 계모의 지위는 사회적·법적으로 보장 됐다. 즉 후처라 해서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문제는 후기 들어 여성의 지위가 추락했고, 혈연주의가 강화되면서 ‘계모=사악한 사람’의 등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국문학자라는 것이다. 미시사의 바람에도 고루한 역사학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지금 외려 국문학자들이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저자의 미시사 분야책은 이번이 두번째. 연전에 펴냈던 책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조우석 기자(2004.6.5)
서울신문 : 오늘날 사회가 급변함에 따라 가족 또한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호주제 폐지 움직임이 본격화하는가 하면 이혼과 재혼율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이것은 더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혼과 재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편부모 가정을 색안경을 끼고 본다.가족에 대한 이같은 ‘편견’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그 이유는 무엇일까.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가족사(家族史)’다.
‘향랑,산유화로 지다’(정창권 지음,풀빛 펴냄)는 17세기 조선 서민층의 가족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흥미로운 책이다.저자(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는 왜 하필 17세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향랑이란 또 무엇인가.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먼저 한국의 가족사가 17세기를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었음을 알아야 한다.
저자는 16세기 조선 중기에는 처가살이 혹은 남귀여가(男歸女家)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강조한다.그런 만큼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았고 친족관계에서 외손과 본손을 구별하지 않았다.재산은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상속받았으며,조상의 제사도 서로 돌려가며 지내는 윤회봉사를 했다.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사정은 달라진다.가족제도는 부계 적장자 위주로 변했고,친족제도도 모계와 처계를 배제한 부계만으로 한정됐다.혼인제도 역시 친영(親迎)과 시집살이로 바뀌었으며 재산상속도 점차 아들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17세기 조선의 완고한 가부장제에 자살로 저항한 여인 향랑의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이혼과 개가를 둘러싼 향랑의 억울한 사연은 훗날 여러 문인들에 의해 열녀담 형식으로 작품화됐다.한편 향랑은 자신의 오갈 데 없는 처지를 백제 망국의 한을 담은 민요 ‘산유화’의 곡조를 빌려 노래했다.“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천지가 비록 크다 하나/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물고기 배에 장사지내리.”
향랑의 자살은 17세기 가족사의 변화,곧 가부장제의 정착 과정에서 일어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이 사건엔 어린 시절의 계모 문제나 가정폭력,이혼,재혼 문제 등 가족 내 갈등 양상이 모두 반영돼 있다.때문에 향랑의 일생을 좇다 보면 당시 가족사의 명암은 물론 서민가정의 생활문화까지 그대로 엿볼 수 있다.향랑 사건을 단순한 서민층 열녀담이 아니라,한국 가족사를 새롭게 고찰하는 매개 고리로 삼는다는 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김종면기자(2004.6.5)
국민일보 : 향랑은 17세기 후반을 살다가 18세기로 접어든 숙종 28년(1702년)에 자결한 여인이다. 향랑의 자결은 어느 양반 계층의 열녀들처럼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향랑은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칠봉과 결혼한 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돌아오지만 친정 부모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겨우 몸을 의탁한 숙부는 향랑에게 개가할 것을 종용했다. 개가를 원치 않았던 향랑이 강물에 몸을 던진 것은 자신의 의지가 통용되지 않는 조선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인 정창권씨는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적 글쓰기라는 흥미로운 문체로 향랑 사건의 첫 기록자인 선산 부사 조구상을 통해 이 사건을 파헤친다. 완고한 가부장제가 정착되던 17세기 가족사의 모순과 서민 가정의 생활 문화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정철훈기자(2004.6.3)
세계일보 : 조선시대 한 여인의 고단한 삶 조명
향랑은 17세기 후반을 살다가 숙종 28년(1702)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극히 평범한 조선의 여인이다.
향랑은 계모 밑에서 자랐고, 결혼은 했지만 남편의 외도와 폭력으로 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이 같은 생활을 참다못해 결국 이혼했다. 이혼 후 친정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시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도 그를 맞아주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원통한 처지를 한탄하는 민요인 ‘산유화’를 부르고 자결함으로써 비극적인 인생을 마무리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후대 기록에는 그가 개가를 거부하고 자결한 ‘열녀’로 적혀 있다.
요즘 여성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내가 미쳤어? 죽긴 왜 죽어’라며 17세기 여성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낄 것이다. 나아가 그렇게 만든 남성 사회의 잘못된 점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법하다.
‘향량, 산유화로 지다’는 향랑 자결 사건을 통해 조선 후기 가족사의 변화 과정을 파악함으로써 현대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회적 인식의 기원을 탐색하고 있다.
저자는 고려시대나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성의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조선 후기 주자학이 들어오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 가부장제가 정착하면서 여성의 지위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여권 신장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17세기 이전의 여권 중심의 사회상이 흥미롭다. -신동주기자(2004.6.4)
헤럴드경제 : 17세기에도 이혼갈등 있었다-조선후기 가족내 갈등구조 상세히 그려
최근 들어 호주제 폐지 논쟁과 가정폭력, 이혼율과 재혼율 증가, 계부모 자녀의 일반화가 중대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가족제도의 커다란 변혁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17세기 역시 그런 시기였다.
정창권이 쓴 '향랑, 산유화로 지다' (풀빛)는 한 여인의 자살사건을 토대로 17세기 한국 가족사의 전후를 보여준다.
향랑은 17세기 후반을 살다가 18세기로 접어든 숙종 28년(1702)에 자결한 여인이다. 이 시기 대표적인 열녀로 알려진 그는 실은 여느 양반 계층의 열녀들처럼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여인이 아니었다.
평민층 여성인 향랑은 칠봉과 결혼한다. 칠봉은 향랑을 미워하며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그 폭력을 견디다 못한 향랑은 칠봉과 갈라서고 친정으로 돌아오지만 친정에선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숙부 집에 몸을 의탁하지만 숙부가 개가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다시 시댁으로 돌아온다. 시아버지도 그에게 개가를 권유하며 받아주지 않자 향랑은 자결을 결심한다. 개가는 그에게 불행했던 혼인생활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향랑의 자살사건은 17세기 가족사의 변화, 곧 완고한 가부장제의 정착과정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가족사건으로 꼽힌다. 여기에는 계모 문제와 가정폭력, 이혼, 재혼 등 가족 내의 갈등적 측면이 종합적으로 반영돼 있다.
조선 중기만 해도 장가와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어서 가족관계에 있어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았다. 17세기 중반 이후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가족제도가 부계 적장자 위주로, 친족제도도 부계만으로 한정되고, 혼인제도 역시 시집살이로, 재산상속도 점차 아들 중심으로 바뀌었다.
계모는 왜 악인이 됐는가에 대한 해답도 들어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계모의 지위가 보장됐을 뿐만 아니라 적자와 의자 사이에 법적인 차등을 두지 않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후기 들어 혈연주의 강화, 여성의 지위 하락, 가부장적인 지식인들의 왜곡된 발언 등으로 악인으로 낙인 찍히게 됐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의 가해자도 바뀌었다. 부부싸움의 가장 큰 이유는 남편의 외도. 조선 중기까지는 아내의 남편 구타가 문제될 정도였다. 후기 남성 위주의 완고한 가부장제가 정착하면서 가부장적 가정폭력, 곧 남편의 아내 구타가 본격적으로 문제시되기 시작한다.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백안시된 것도 이즈음이다. - 이윤미 기자(2004.6.2)
대구일보 : 17세기에도 이혼갈등 있었다 조선시대 가족사 흥미롭게 복원-계모 · 폭력 · 이혼등 가족문제 다뤄
‘가족’은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다. 이혼과 재혼의 증가, 호주제 폐지 논쟁 등은 현대 가족에게 불어 닥칠 변화를 예고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한국 가족문제의 기원과 전승 양상을 조선시대 여인 ‘향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향랑이라는 한 여인의 자살 사건을 토대로 17세기, 더 나아가 과거 한국의 가족사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꾸몄다. 저자인 정창권은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조선시대 가정의 모습을 흥미롭게 복원하고 있다.
향랑은 17세기 후반을 살다가 18세기로 접어든 숙종 28년(1702)에 자결한 여인이다. 향랑의 자살 사건은 조선 후기 가족사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특히 계모, 가정폭력, 이혼, 재혼 문제 등 오늘날에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가족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동안 서민층 열녀담의 주인공으로 주목받아 왔던 향랑은 사실 여느 양반 계층의 열녀들처럼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여인이 아니었다. 또 다소곳하고 얌전하게 자신을 죽이고 살았던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던 조선시대 서민층의 평범한 여성일 뿐이었다.
계모 밑에서 자란 향랑은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임천순의 아들 칠봉과 혼인을 했는데 칠봉은 향랑을 미워해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그 폭력을 견디다 못한 향랑은 칠봉과 갈라서고 친정으로 돌아오지만 친정 부모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숙부 집에 몸을 의탁하지만 숙부가 개가하기를 요구하자 향랑은 이를 거부하고 다시 시댁을 찾는다. 그러나 시아버지 또한 향랑의 개가를 권유하며 그녀를 받아주지 않자 향랑은 자결을 결심하게 된다. 향랑의 자결은 시대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저자는 17세기는 한국 가족사에서 커다란 변혁기라고 서술한다. 17세기는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았고 재산도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상속받았으며 조상의 제사도 서로 돌려가며 지내는 등 여권 신장 의식이 고조되던 16세기에서 다시 완고한 가부장제로 정착되어 가던 과정이다. 향랑 자살 사건은 바로 이러한 부계사회의 정착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저자는 일부종사를 강요받던 시대적 상황이 개가를 거부하고 자결한 향랑을 ‘열녀’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조선 후기 가부장제하에서도 서민층 여성들은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자아를 모색해왔다고 밝힌다.-양지은기자(200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