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1장에 1년이 넘게 걸린 숀 탠의 대작
슬픔을 딛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그림책《빨간 나무》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작가 숀 탠. 의미와 상징으로 가득한 그림, 정교한 터치와 환상적인 배경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다. 때문에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숀 탠의 그림책은 반드시 봐야 할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번에 선보이는 숀 탠의 신작《여름의 규칙》은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2009,사계절) 이후 5년 만에 국내에 선 보이는 그림책으로, 스케치 1장에 1년이 넘게 걸렸다는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숀 탠 그림 세계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액자에 걸어 두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환상적인 그림들이 총 48페이지에 걸쳐 펼쳐진다. 독자들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숀 탠의 독특한 스타일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하지만 낯선 ‘관계’에 주목한 책
이 책에는 단 두 명의 소년만 등장한다. 두 소년은 각각 ‘큰 아이’와 ‘작은 아이’라 부를 수 있는데, 숀 탠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둘은 친형제 같기도 하고, 이웃에 사는 형 동생 사이 같기도 하며, 덩치가 차이 나는 친구 사이로 보이기도 한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매우 가까워 보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두 소년은 삭막한 공장 지대에서 거대한 붉은 토끼를 피해 몸을 숨기고, 실수로 달팽이를 밟았다가 토네이도를 불러일으키고, 완벽한 계획을 실행하려다 실패하며, 의견 차이로 인해 주먹다짐을 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두 소년이 실제로 어떤 관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숀 탠이 이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깝지만 때로는 낯설게 느껴지는 ‘관계’ 그 자체이다. 그 관계가 주는 긴장감이 바로 《여름의 규칙》을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게 만드는 핵심이다.
무엇이든 상상하라, 상상한 만큼 보인다!
숀 탠은 《여름의 규칙》을 통해 독자들이 평소에 해 보지 않았던 상상을 하기를 바란다. 명확한 주제의식과 교훈적인 메시지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다소 의아할지도 모른다. 공룡을 닮은 로봇, 선사 시대에서 온 듯한 파충류,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까마귀, 무시무시하게 큰 토끼 등……. 이 책은 언뜻 기괴해 보이는 이미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숀 탠은 정답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정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숀 탠은 작가의 권위적인 설명에 함몰돼 독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름의 규칙》은 독자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책이다. 부디, 이 책의 의미를 잘 찾아보기를 바란다.
숀탠과의 인터뷰
* 본 인터뷰는 숀탠 공식 홈페이지(http://www.shauntan.net/)에 실린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작가의 말_인터뷰 전에 당부할 말이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의도를 밝히면 그것은 일종의 권위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제한하게 되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 설명은 그저 참고 사항으로만 받아들여주시고, 여러분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두 명의 어린 소년은 무슨 관계인가?
보통 형과 아우라고 생각할 텐데, 나이 차가 있는 친구 사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어느 경우든 우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이 책은 그런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토끼를 거대한 괴물처럼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 둘을 오들오들 떨게 하는 동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커다란 검은 개, 늑대 등. 이런 동물들은 원래 무섭게 느껴지죠. 하지만 순한 초식 동물인 토끼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래서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보이는 붉은 색의 토끼는 더욱 무섭게 느껴질 것 같았어요.
사람처럼 옷을 입은 매는 무엇을 상징하나?
앞의 토끼도 마찬가지지만 가만히 지켜보는 매 역시 다음에 어떤 폭력적인 행동을 취할지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어서 더욱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서 지켜보는 매의 눈은 환하게 밝혀진 불빛을 반사시키면서 가장 검게 그린 부분입니다.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전달될 지 궁금합니다.
마치 선사 시대 동물처럼 보이는 파충류들은 어떤 의미인가?
저는 집 안에 야외에 사는 생명체가 들어오는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선사 시대 동물처럼 보이는 것들은 우리 집에 있던 화석에 관한 책에 그려진 그림에서 따왔습니다.
달팽이와 토네이도는 무슨 관계인가?
이 그림은 단순히 재미있어서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달팽이와 토네이도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둘 다 나선형이라는 사실만 빼면요. 텍스트와 그림을 연결시키는 것은 참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커다란 딸기는 무엇을 뜻하나?
딸기는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금 접시나 성배 같은 것보다 시각 ? 미각 ? 촉각 ? 후각 등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감각에 훨씬 잘 호소하지요. 아니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단의 혹은 금지된 열매’를 상징할 수도 있고요.
소파에 앉아 있는 고양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고양이 역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 소파에는 늘 고양이가 앉아 있었죠. 요즘에는 앵무새나 잉꼬가 곁에 있습니다. 어쨌건 이 책에 나오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고양이 역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로봇처럼 보이는 기계들은 무슨 뜻인가?
두 아이의 사이가 멀어질 때 로봇들이 출현합니다. 그것은 다른 ‘친구’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어쩌면 도플갱어일 수도 있고요. 배터리 또는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친구’가 실제 두 친구와 비교해볼 때 어떤 존재인지는 여러분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까마귀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책 전체에는 까마귀가 나옵니다. 이것은 제 고향인 오스트레일리아 서부에서 흔히 보이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까마귀는 이 책의 다른 동물들이 그렇듯 그 자체로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없습니다. 다만 두 소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지요. 두 친구가 사이가 멀어질수록 까마귀 떼는 늘어납니다. 두 친구의 텅 빈 마음의 크기가 까마귀의 수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가을 또는 겨울의 풍경도 보이는데?
딸기가 나오는 장면은 가을 풍경처럼 보이면서 여름의 한낮과 대조되는 초현실적인 인상을 줍니다. 또한 기차가 나오는 풍경들은 여름이라기보다는 겨울 같은 느낌을 주고요. 이것은 정서적인 은유로 보아도 좋습니다.
풍경이 특이한데, 특별히 참고한 곳이 있나?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오스트레일리아 서부의 아직 개발이 덜 된 해안가 교외 지대의 풍경에는 늘 까마귀가 있었고, 버려진 자동차며 부서진 냉장고나 텔레비전 따위가 풀밭이나 모래 언덕에 쌓여 있기도 했지요. 멀리 보이는 공장 지대는 변두리의 산업 세계를 뜻하고요. 이들은 삭막하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아름다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 영향을 미친 화가가 있다면?
글쎄요, 제 그림들에서 많은 화가나 작가를 연상할 수 있을 텐데요. 앤드류 와이어트, 오노레 도미에, 제프리 스마트, 고야, 폴 내시, 아놀드 뵈클린과 같은 화가들의 그림에서 일부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빨간 나무》가 개인이 느끼는 낯선 내면을 다루었다면 《여름의 규칙》은 친한 사이에서의 낯선 관계를 다루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아주 친밀한 관계 안에서도 이따금 우정을 시험당하는 상황에 놓이곤 합니다. 매 장면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독자 여러분 스스로 알아내기 바랍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