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초판이 나온, 한국 음악계의 거장 황병기의 에세이집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의 개정판이다. 초판이 나온 지 2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가 없어진 일부 글을 솎아 내고 그동안 바뀐 표기법과 새로운 용어 등을 반영해 개정판을 펴냈다. 거기에 1994년 이후 오랜 음악적 사색의 결과물과 전 세계 해외 연주 여행의 경험 그리고 고故 백남준에 대한 회고 등 새로운 글들을 더해 개정판을 내놓았다.
▣ 황병기의 모든 것을 담아내다
황병기黃秉冀는 비단 국악인으로 한정하기 힘든, 말 그대로 한국음악계의 거장이다. 십대부터 국립국악원을 드나들며 여러 명인에게 가야금을 사사하며 가야금을 배웠던 그는, 대학 국악과 교수와 가야금 연주자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지 않고 여든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꾸준히 동서양 음악가와 교류하면서 우리의 전통 음악을 20세기 현대음악과 다양한 민족음악에 접목하는 등 다양하고 창조적인 시도를 통해 국악의 현대화•세계화를 꾀해 오면서, 한국음악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낸 명인名人이다.
이 책은 황병기 본인 스스로가 전공인 국악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민족음악과 현대음악, 나아가 음악 전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진정한 소리와 음악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내밀하게 전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 시대 한국음악계의 거목인 황병기가 음악 전반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 음악에 대한 친근한 이야기
책의 성격이 에세이집인 만큼 이 책에 실린 글의 대부분은 국악이나 현대음악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학술적이거나 전문적인 성격의 글이 아니다. 주로 언론에 기고한 글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 책에 실린 글은, 전통 국악이나 현대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누구나 편히 읽으며 음악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를 높일 수 있도록 친근한 어조로 쉽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다섯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나와 우리 집 사람들’은 황병기와 가족 그리고 가족의 일원인 가야금에 관한 글을 엮어 한 사람의 인간인 황병기의 소소한 모습을 담아냈다. 2부 ‘음악과 사색’은 수십 년간 음악을 하면서 사색한 글을 엮은 것이며, 3부 ‘국악 이야기’는 음악 중에서 주 전공 분야인 국악의 특징과 아름다움 그리고 국악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데 모았다. 4부 ‘동서음악 산책’은 다른 나라의 음악, 특히 서양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쓴 글로 구성되어 있으며, 5부 ‘해외여행기’는 전 세계 곳곳에서 열렸던 해외 가야금 연주 여행의 체험담을 모았다.
▣ 세상에 더해진 황병기의 사색
황병기는 음악 활동을 해 오면서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했던 글을 엮어 1994년에 에세이집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를 펴냈다. 책이 나온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황병기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의미가 퇴색한 일부 글 대신에 새로운 글을 대신 넣어 개정판을 펴냈다. 개정판에 더해진 새로운 글은 저자가 이순耳順과 종심從心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동서양 음악가들과 두루 우정을 나누면서 한국음악의 진수를 가야금 선율로 선보인 해외 연주 여행을 비롯해, 음악과 소리에 대한 구도자求道者적인 사색을 담고 있다.
특히 <두드림,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아서>의 경우, 단군 신화의 천부인에서 시작해 사찰 음악과 제례악을 거치는 등 수천 년 동안 지켜 내려온 우리 소리 문화의 궤적을 오롯이 설명한 명문名文이었다. 하지만 한시적으로 발간된 비매품 책자에만 실려 많은 사람들이 읽지 못했던 아쉬운 글이었지만, 이번에 개정판에 실리면서 우리의 소리 문화 안에 녹아 있는 ‘두드림’의 의미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하며 국악과 우리 소리 문화를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 백남준과의 뜨거운 우정
2006년 타계한 고故 백남준과 황병기의 우정은 많이 알려졌다시피 아주 돈독했고, 그랬던 만큼 백남준에 대한 황병기의 회고는 가히 절절하다.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황병기는, 1968년에 전위음악가이자 행동예술가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백남준과 처음 만난 후 40년 가까이 백남준과 친분을 나누면서 여러 차례 협연하기도 했고, 그의 소개로 존 케이지를 비롯한 많은 전위음악가들과도 교분을 나누면서 음악적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초판에는 여러 글에 나뉘어 실렸던 백남준에 대한 우정의 기억을, 황병기는 백남준이 작고한 시점에서 새롭게 정리했다. 황병기는 백남준과의 운명적이었던 첫 만남부터 뉴욕에서 전위음악과들과 함께한 교류하며 연주회를 열었던 소중한 경험, 백남준이 자신과 현대 예술계 전반에 끼친 영향 그리고 백남준의 분향소에서 눈물로 <침향무>를 연주하며 백남준을 떠나보내야 했던 가슴 시린 공연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인생의 선배이자 지음知音이었던 백남준과 나누었던 소중한 우정을 담담히 말하고 있다.
황병기黃秉冀
193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1951년부터 국립국악원에서 김영윤, 김윤덕, 심상건, 김병호 등 여러 선생에게 사사하며 가야금을 배웠다. 1959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신설된 동 대학교 국악과에서 4년간 강의한 뒤, 공연장 지배인과 화학회사의 기획관리실장,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사, 출판사 사장 등으로 실업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61년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한국 최초로 서양 오케스트라와 가야금을 협주한 <가야금과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정회갑 작곡)을 초연하고, 1962년에는 첫 가야금 창작곡인 <숲>을 내놓은 이후 영화음악, 무용음악 등을 작곡해 창작국악의 지평을 열었다. 1965년 미국 워싱턴 주립 대학, 1968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했으며, 1974년부터 200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와 대한민국 예술원 음악분과 회원,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1965년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 음악 예술제’에서 연주한 것을 시작으로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해 미국, 영국, 네덜란드, 핀란드, 일본, 중국, 프랑스, 알제리, 이탈리아, 스위스 등 전 세계의 주요 공연장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고, 각국에서 국악 레코드를 취입했다. 1990년에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남측 대표로 참가했으며,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90송년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으로 일했다. 1994년에는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2004년부터 2005년까지는 국악축전 조직위원장을 맡아 국악 진흥에 힘썼다. 2005년에는 광복60주년기념문화사업추진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다.
1965년 국악상, 1973년 한국영화음악상, 1990 공연예술평론가협회 예술가상, 1992년 중앙문화대상, 2004년 호암상, 2006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8 일맥문화대상, 2010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표 가야금 작품집으로 《침향무》, 《비단길》《미궁》, 《춘설》, 《달하 노피곰》 등이 있고, 저서로는《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 - 황병기의 삶과 예술 세계》(생각의나무, 2008), 《오동 천년, 탄금 60년 -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등이 있다.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의 개정판을 내면서
초판 머리말
1부 나와 우리 집 사람들
은행나무 밑의 사탕 그릇
개구쟁이에게 배움의 기쁨을 일깨워 준 참스승
고교 교복에 짚세기 신던 대학 시절
‘하품’ 없는 한평생, 아버지
아빠의 육아 수첩
명금名琴 이야기
집사람의 위기 대처 능력
2부 음악과 사색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멋과 맛, 그 절묘한 예술의 향기
봄과 에로티시즘
시각예술과 청각예술의 차이
고법鼓法의 7단계
일승원음一乘圓音을 듣고
바다의 소리, 그 원초적 이데아
음악의 출발
옛것에서 찾아야 할 우리 것
우리 춤, 생명의 희열
춤의 무게와 깊이
옛 절의 악기 그림
바람도 없는 공중에 내는 수직의 파문
‘음악회’에 대한 남북의 이질성
레코드, 현대 음악 문화의 중심
음악과 약
법률과 음악
《논어》의 재미
3부 국악 이야기
국악의 참맛
무위자연의 음악, 정악(正樂)
순박한 서민의 흥겨운 노래, 민요民謠
남도악南道樂의 멋
소리판 잔치
지명地名의 노래 시詩
새로운 음악 문화와 국악
가야금과의 만남
새로운 가야금의 세계를 찾아
가야금의 미래
가야금의 명인 심상건沈相健과 강태홍姜太弘
죽파竹坡 김난초金蘭草의 가야금 산조
김소희金素姬 여사의 예술 세계
국립국악원 초창기의 지도자들
쌍골죽, 대나무 소리의 신비
비밀의 노래 <할향喝香>
세계화 시대와 거문고 음악
두드림,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아서
4부 동서음악 산책
동서양 악기의 만남
음악 향유의 양식
대중가요와 민요
국악과 대중음악
균형 있는 음악 문화
재즈와 고정관념
전위음악의 의미
알려지지 않은 피아노의 천재들
음악적 시간과 리듬
백남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5부 해외여행기
유럽 음악 기행
베네치아의 밤
천상•마구간•백야의 하계 음악회
유럽 땅에 메아리친 우리 가락
일본에서 찾은 침향沈香
바르샤바 옛 왕궁에서의 가야금 독주회
니스의 호숫가에서 연주한 가야금
베르사유 왕궁과 알제리 국립극장의 추억
러시아 연주 여행에서 있었던 일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브뤼셀과 헬싱키 공연
주일 한국문화원의 개막 공연
“젊은이들 스마트폰 가지고 놀 듯, 난 論語와 놀아”
A4 용지에 써서 논어 외우는 황병기
황병기 가야금 명인은 논어의 중요 문장을 원문으로 외운다. 많은 책을 보기보다 적은 수의 책을 정독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외우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으냐고 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게 희열을 안겨준다고 했다.
블랙커피를 예를 들었다. 커피는 쓰기 때문에 기호품이 돼 있다는 것. A4 용지에 압축된 논어를 타이핑해 항상 지니고 다닌다. 황 명인은 “요즘 젊은이들이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데 나는 ‘논어’와 더불어 노는 셈”이라고 했다.
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를 인용했다. 황 명인은 “공자는 ‘때때로 익히라’고 했지 ‘열심히 익히라’고 하지 않았다. 목에 힘을 준 말이 없다”며 “단정하지 않고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물어보는데서 민주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익히고 배우는 즐거움이 최고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황 명인의 장남인 황준묵 한국고등과학원 교수가 세계적인 수학자가 된 것도 아버지로부터 배우는 즐거움을 이어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1994년 초판이 나온 에세이집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풀빛)의 개정판을 냈다. 오랜 음악적 사색의 결과물과 한국음악의 진수를 가야금 선율로 선보인 전 세계 연주 여행의 경험, 고 백남준에 대한 회고 등 새로운 글을 더했다.
황 명인은 ‘세계화 시대와 거문고음악’이라는 글에서 “세계화 시대에 우리 전통음악에서도 서양적인 것을 수용하고 우리 것을 희석함으로써 서양음악과 비슷한 음악을 만들어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음악상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며 “하지만 세계화 시대일수록 세계 어느 곳의 음악과도 다른 각 민족 고유의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하려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황 명인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거문고는 전세계에서 한국에서만 있다”며 “하나의 음에서 다른 음으로 넘어가려면 하나의 음세계를 파고드는데 오묘한 도사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나 편히 읽을 수 있는 황 명인의 친근한 어조가 울리는 ‘깊은 밤…’을 보면 그가 국악인으로 한정하기 어려운 한국음악계의 거장임을 재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두드림,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에세이는 단군 신화인 천부인에서 시작해 사찰 음악과 제례악을 거치는 등 수천 년 동안 지켜 내려온 우리 소리문화의 궤적을 오롯이 설명한 명문이다.
- 문화일보 2012년 10월 20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