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7년 전 광주에서 일어났던 5·18을 제3자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작업이 가능해진 것은 지난 4월 17일 광주학살을 통해 권좌에 올랐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마침내 엄중한 사법적 심판이 내려졌고, 4월 29일에는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됨으로써 법적인 청산과 부분적으로나마 명예회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치로 5·18이 정의와 양심을 향한 인간정신의 승리임이 확인되고 역사적 단죄를 통해 정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이념이 갖는 엄숙한 역사정신을 널리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날의 진실은 17년 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외신보도를 통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나 정작 국내에서는 학살의 당사자였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줄곧 광주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시켜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법적 청산이 이루어진 마당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는가를 밝혀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진실은 언론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특히 현장 취재기자는 누구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흥분한 광주시민이나 치밀하게 진압작전에 나선 신군부 세력 등 모든 당사자로부터 독립된 냉철한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자들의 증언은 값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들의 증언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객관적 사실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엄연한 1980년 5월 역사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1부 신군부의 만행을 전세계로 타전하다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며
격동의 10.26과 12.12를 돌아보며
광주는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총쏘는 시민군에게 `가자 가자' 고함치며 손들어
피해 우려해 미군 부대서도 출입 금지시켜
진입작전 촬영하려 하자 공수대원 집중사격
광주 취재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자랑
기자 사명과 외교 요청의 갈등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 흥분된 현지의 목소리
절대 평화주의자인 나에게 떨어진 `직접 취재지시'
살벌한 외곽 검문소와 평화로운 광주 도심은 너무나 대조적
시위대 대변인은 `제퍼슨식 민주주의자'로 보였다
미국 대사의 개입을 호소하는 기사를 쓰다
젊은 여자의 확성기 소리에 눈뜬 27일 새벽
새벽을 가르는 총성과 폭발음 비명 고함소리들
엉겁결에 깨문 손가락에서 피가
내 인생에서 처음 본 젊은 청년의 시체
광주는 내 인생을 바꾸어버렸다
미국 관리들은 예측할 수 없는 북한에만 치중
광주 기사 이유로 주일 미국 대사 한국에서의 신변위협 암시
글라이스틴 대사 상황인식 잘못했다
광주사건은 폭동이 아니라 봉기였다
전두환씨 등 신군부 움직임에 촉각
프랑스 르몽드 기자와 함께 광주로 출발
개선장군처럼 수십만 시민들에게 환영받다
병원복도에 흥건히 고인 부상자들의 핏물
시민군 지도부는 시민 의견 들어 활동방향 결정
시민군측에서 미국 대사와 협상 요구해 난감
`외국인은 광주를 떠나라' 경고방송 시작
신군부 비판 기사로 합수부로 연행되어 곤욕을 치르다
광주항쟁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
목가적 전원도시에서 펼쳐진 악몽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길에는 검문과 차량 잔해만
체육관에 있던 60여 구의 시체에는 꽃들이
`하루빨리 미국 대사에게 광주 설명해 달라' 절규
광주유혈극에 대한 재판은 의미있는 진전
80년대 한국 민주화는 광주항쟁 정신 때문에 성공했다
본사 지원 취재 지시 따라 한국으로
이름 모를 청년 도움으로 무사히 광주 중심지에
시민군 본부인 도청에 일반 시민 아무나 드나들어
당시 찍은 사진 본사 조사부에 보관
항쟁지도부 벽에 새겨졌던 `세계평화'
미국 정부가 최규하 대통령 계획을 지지하는 실수 저질러
전두환씨가 5월 17일 경복궁 쿠데타를 감행
`광주시민 5분의 1이 성나 날뛰고 있다'
한국신문들은 시위대 다이너마이트 탈취를 강조
도청 앞 체육관 시신 중에는 중년 여인과 7살짜리 아이도
카메라에 담은 5. 18 광주 현장
광주 취재를 본사에 요청해 허락 받아
수차례 검문 끝에 광주진입 성공
널려진 시신보고 기가 막혀 촬영도 잠시 중단
시장은 평온하고 과일 음식물도 많아
필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 속에 숨겨
윤상원 그의 눈길에 담긴 체념과 죽음의 결단
나의 취재기 중 가장 뚜렷이 남은 기억은 `광주'
죽음의 그림자 드리운 대변인은 침착했다
젊은 대변인을 소재로 한 글이 1면 머릿기사로
뒤 늦게야 알게 된 대변인 이름 윤상원
뒤늦게 망월동 찾아 참배
대학 재학 중 사회과학 서적 탐닉
은행원 6개월만에 사표내고 공장 근로자로 취직
그는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야학 개설하고 노동자에게 노동법 강의
항쟁 초기 투사회보 발간
희망적인 뉴스 전파에 적극적
정보기관원 항쟁지도부에 침투
윤상원은 `고립지역 사수전략'으로 군사정권 뒤엎으려 했다
제2부 취재수첩에 묻어둔 광주의 진실
나의 운명을 바꿔 놓은 광주
광주 인근 주민들 취재진을 간첩으로 오인
도청 안 학생 책임자 만난 뒤 협조 받아
철도전화 통해 기사 송고
광주를 사망자 숫자로만 평가해선 안 돼
광주의 고귀한 희생이 민주주의 발전시켜
모든 이의 광주가 되도록 하는 노력 필요
아직도 굳지 않는 핏자욱
왜 쓰게 됐나
15일부터 포착된 이상징후
첫 기사 `사람사냥이 시작됐다'
독서실 고교생까지 무자비하게 곤봉세례
`질서를 지키자' 살아있는 민주시민의식
병원 앞을 메운 헌혈인파로 혈액도 넘쳐
초등학생의 기억에 남은 `군인이 사람 죽인 이야기'
광주에서 흘린 피 아직 안 굳어 역사적 재정립 절실
오월 광주의 회상
수십만 군중의 함성이 울려 퍼진 분노의 금남로
피의 초파일
영안실의 통곡
언론도 적이다
취재수첩의 마지막 장
금남로 아리랑
취재명령 `광주가 심상찮다'
5. 18전야
계엄군의 도발
인간사냥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
그때 그 여인 전옥주
허기와 졸음은 주검도 못 쫓는다
부마와 광주
광주 사람 다 죽인다고 전해주시오
17년 후 광주 밖에서
아직도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군 작전도로 따라 광주잠입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2천명 사망에 2천명 행방불명
묶어서 죽인 시체들
개선장군들의 입성
`당신이 도경국장이요?'
보안사에서 경위서 써
경상도 기자의 위기일발
누가 적인지 벗인지
두 자루의 카빈총 앞에서
`광주 보도 못합니다'
아아, 광주여! 어두운 역사의 통곡이여
1980년 5월 21일 낮 12시 55분
9박 10일간 눈보다는 가슴으로 느낀 취재
취재 첫날
5월 20일, 흥분한 시민들 거리 곳곳으로 쏟아져 나오고
5월 21일, 여자 목소리 따라 밤을 지새운 시위
5월 22일, 피 엉킨 인도에 파리들만 윙윙
다시 평화로운 시위
5월 23일, 무서운 적막이 시가지를 뒤덮어
5월 24일, `제2의 판문점' 세우고 대치
5월 25일, 독침사건 이후 다시 총소리가
5월 26일, 수습위는 최선을 다했지만
5월 27일, 광주시민들의 높은 의식에 찬사를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광주
쓰지 말아야 할 글을 쓸 수밖에
당초의 진상규명 의도 무산
광주에 진 빚 언제나 갚을 수 있을까
신문사진 한 장이 역사를 뒤바꾸기도 했건만
왜 광주였나
시민들에게 증오의 대상 된 기자
무거운 마음으로 사망자 사진 찍을 수밖에
사진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제3부 광주5월 민중항쟁 관련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