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디흔한 하지만 특별한 단어, 사랑
사랑처럼 식상하고 흔한 말이 또 있을까. 그 단어를 내뱉는 것조차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온 사랑은 너무도 특별하다. 흔하기는커녕 다시없을 것 같은, 나에게 온 사람이고 감정이다. 그런 특별함이 가장 잘 묻어나는 말이 첫사랑이 아닐까 싶다. 사랑은 늘 특별하고 그래서 모든 사랑은 첫사랑일지라도 그게 정말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이라면, 그 여운은 너무도 깊고 길다.
여기, 사랑인 줄도 모르고 5년을 함께하다가 옆에 없고 나서야 비로소 떠난 그 친구를 그리워하는 초보 작가가 있다. 사귀지 않았으니 헤어진 것도 떠난 것도 아닌 그녀가 자신에게 어울릴 것 같다고 지정해 준 작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순정파. 혹은 찌질이. 또 다른 5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 순수했던 자신의 감정을 첫 글에 담아 본다.
첫 글을 쓰는 사람에게 첫 문장보다 중요한 건 없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여행, 첫 이별, 첫 후회, 첫 울음, 첫 재회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민다. 첫 삽질이 엇비슷하긴 하다. … 첫 문장을 첫 삽질이라고 바꿔 부르면 어떨까? 초짜의 글쓰기란 결국 방향성 없는 삽질의 연속이니까. …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썼다 지웠던, 지웠다가 다시 썼던, 또 지웠던, 또 썼던, 다시 지우고 또 썼던 수십 개의 문장, 또는 수십, 수백 번의 삽질 … 결국 나는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멋 부리지도 않고, 비장한 체하지도 않고, 놀란 척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가기로 말이다. … 5년 전, 기린교를 건너 다시 세상에 돌아온 그 순간의 깨끗하고 단호했던 마음, 페이의 집 앞에 쌓인, 아니 결코 쌓일 수 없는 눈을 쓸려던 그 아름답던 마음으로 돌아가서. (5~8쪽)
시작은 2007년 5월 6일 오전 11시 35분, 일요일, 롯데마트 앞 횡단보도. 두부 심부름을 나온 나는 신호 바뀌기만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중. 그러다 갑자기 건너편이 갑자기 환해진다. 불이라도 났나 싶어 쳐다보니 한 여자애가 있다. 청바지에 녹색 반팔 티를 입은 여자애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눈앞에 불꽃이 팍팍 튀었다. 귀가 멍멍했다.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여자애를 주시했다. 여자애가 횡단보도 쪽을 보았고, 나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마치 선으로 연결되어 있던 것처럼. 여자애는 입술 끝을 올리고 살짝 웃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법한 이 장면이 5년의 인연으로 이어진 건 정확히 그다음 주 일요일. 갈 데가 있다며 빈둥거리던 나를 일으켜 세운 엄마를 따라나서 횡단보도를 건너 롯데마트를 지나 아파트 입구를 통과해 마주한 402동 1211호 현관문.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 준 건… 일주일 전 건너편을 환하게 밝힌 바로 그 여자애. 이건… 운명?
운명의 장난은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나의 엄마와 페이(건너편을 밝힌 여자애)의 엄마 아빠는 같은 대학 같은 과 동창들이었던 것. 지난 3년간 대구에서 살다가 페이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다시 이사를 오면서 10분 거리에 살게 된 옛 친구들의 왕래가 시작되면서, 페이와 나는 (다른 친구는 없는, 그래서 둘도 없는) 친구로 만나며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과 재수생으로, 여전히 대학생과 군대 가는 날을 받아 놓은 대학교 자퇴생으로 성장해 간다.
불현듯 다가온 사랑, 그 속엔 길고 긴 역사가 있었다
‘페이’가 진짜 이름은 아니다. 페이의 공부방이자 페이 아빠의 서재 책장에서 우연히 꺼낸 낡은 시집에서 둘은 ‘벽’과 ‘경’이 주고받았던 포스트잇과 메모들을 확인했고, 그 위에 또 다른 이름 ‘패’도 보았다. 이 세 명의 묘한 관계를 마치 탐정처럼 추적하다 페이가 자신을 ‘패’의 딸로 확신하고 붙인 이름이 페이이다. 복잡한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지듯 드러나는 벽과 경 그리고 패 사이의 숨겨졌던 관계는 마치 나와 페이 사이의 끝을 보여 주는 기시감처럼 소설 속에 등장한다.
나에게 페이와 끝없이 연관되어 나타나는 과거의 기시감이 또 하나 있다. 패, 경, 벽의 과거를 장식했던 오래된 시집의 주인공 시인의 문학관을 찾은 나는 페이와 헤어진 지 정확히 6개월 4일 만에 그곳에서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우연처럼) 페이와 재회한다. 하지만 싸늘한 페이는 나를 남겨 두고 문학관을 떠난다.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 수성동 계곡으로 향한 내 발밑에 손바닥만 한 거북이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등짝엔 물음표(?)가 노랗게 빛나고 나를 돌아보며 돌아가신 할머님처럼 빙긋 웃는 거북을 따라 나는 무모하게 기린교를 건넜다. 거북은 사라지고 나를 맞이한 건 높은 솟을대문을 열고 나온 눈매가 도루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남자였다.
남자의 이름은 이용. 세종의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자신의 꿈을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몽유도원도>라는 명작을 그리게 했던 시대의 지성 안평대군이었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나를 보았다며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페이와 나눈 추억의 한 장면을 채웠던 <몽유도원도>를 내밀며 이틀 동안 그 그림을 보게 해 주겠다고 한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이렇게 나는 15세기 역사의 한복판에, 혹은 소설 <운영전> 속에, 혹은 한 자락 꿈속에 뛰놀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안평대군과 그에게 소속된 열 명의 궁녀, 그중에서도 안평대군이 몹시 아꼈던 운영과 운영이 목숨을 걸었던, 앳되고 똑똑한 (하지만 내가 보기에 몹시도 어리숙한) 김 진사 사이에서. 페이와 똑같이 생긴 운영에 대한 안평대군의 외사랑과 운영과 김 진사의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사이에서 목숨 오가는 일을 도맡아야 했던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페이에게 그 얘기를 전하면서, 헤어졌지만 더욱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을 키워 간다.
혼자 남은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이용이 정한 무시무시한 원칙이었다. 궁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모가지 댕강, 남자에게 존재가 알려져도 모가지 댕강이라는 살벌한 원칙. 내가 하려는 일은 이용의 원칙을 정면으로 배반해야 가능했다. 어쩌면 이용의 신의마저도. 하지만 제 나름의 방법으로 목숨을 걸고 간절하게 부탁한 운영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 그건 그렇고 페이를 닮은 운영의 존재는 도대체 뭘 뜻하는 걸까? 이용은 도대체 왜 나를 운영에게 안내한 걸까? 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난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아이고 머리야. 이용도, 운영도, 할멈도 내게 문제만 잔뜩 안겨 주었을 뿐. 숙제만 가득한 별세계. 꼭 다니기 싫었던 학교 같은.
페이, 너라면 어떻게 했겠니? (58쪽)
나는 그 격랑의 장소, 폭풍의 장소, 한바탕 꿈속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용기 있는 첫사랑에 보내는 ‘좋아요’
지금까지 한국 고전과 역사 속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던 소설가 설흔은 이번 작품 《첫사랑의 세 번째 법칙》에서도 그의 장기를 한껏 발휘하며 시점이 종점이 되고 종점이 시점이 되는 사랑의 길고 긴 역사에 대해 깜찍하고도 발랄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바로 우리 곁을 지나칠 법한 평범한 중딩 남자애는 한 여자애를 만나 고등학생이 되고 재수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군 입대를 기다리는 청년이 되어 가는 동안 자신의 부족함을 철없음을 용기 없음을 자신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 만남의 시간 동안 인연은 아버지 어머니 대로, 몇 세기를 훌쩍 건너뛰어 역사의 한 장면 속으로 이어진다. 지금인가 보면 과거의 이야기이고, 과거 속에 풍덩 빠져 있으면 어깨를 툭 치며 현재로 다시 소환한다. 사실인가 싶으면 꿈이고, 꿈인가 싶으면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어떤 것, 그것이 이 책 《첫사랑의 세 번째 법칙》이 가진 마력이다.
현재를 가까운 과거, 그리고 먼 과거와 이어 줬던 것은 소설가 설흔만이 지닌 능력이다. 고전을 충실히 공부했던 성실함과 성실함 못지않은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성실함과 상상력을 허니밀크티처럼 부드럽게 녹여 내는 작가적 완성도. 그 안에서 우리는 첫사랑의 달콤함, 이 아닌 어딘가 가슴 한 켠이 헛헛하고 뻑적지근하고 못내 아쉽고 슬픈, 묘한 그리움에 휩싸인다. 지금의 혹은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며 영원히 알 수 없을 첫사랑의 세 번째 법칙을 찾아보고도 싶다. 왠지 찌질하고 어리숙한 주인공이 나인 듯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킥킥거리고 빙긋 웃고 또 코끝이 찡해지기도 할 것이다. 사랑은 아픔이고 아픔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기분 나쁜 명제에 씁쓸해지면서도, 주인공의 첫사랑에 첫 삽질에 좋아요를 누르고 싶은 마음은 숨길 수가 없다. 지금 나에게도 좋아요를 누르자. 그게 시작일지 끝일지 누가 알아? 일단 저질러 보는 거지. 열심히 삽질하는 나도, 내 사랑도 오늘은 용기 있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