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습록(傳習錄)》은 중국 명나라 때, 봉건 신분 체제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지며 독창적인 학설을 제창했던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의 어록을 정리한 기록물이다.‘청소년 철학창고’ 마흔 번째 책으로 출간된 《전습록: 실천하는 지식인, 개혁을 외치다》는 원래 상권, 중권, 하권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습록》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양명학의 주요 사상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을 뽑아 6장으로 재구성하였다. 6개의 장별마다 주요 내용을 개괄해 놓았고, 각 소절마다 해당 주제에 부합하는 소제목을 붙여 당시 철학 논제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원전의 본뜻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역하였고 책 말미에는 왕수인의 생애와 시대상, 《전습록》의 탄생 배경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해설을 실었다. 방대한 분량과 심오한 내용이 장벽이 되어 《전습록》을 읽으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던 일반인과 청소년들에게 주제별 내용 선별과 구성, 쉬운 번역과 각 원전 번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풍성한 해설을 갖춘 ‘청소년 철학창고’ 40번 《전습록: 실천하는 지식인, 개혁을 외치다》의 출간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양명학 전문가로서 양명학에 관한 논문과 저술 활동을 펼쳐 온 김용재 교수의 전문가적 역량이 이번 책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에 단순히 ‘쉽다’로만 정의할 수 없는 내용의 ‘깊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왕수인은 당시 지식 위주의 공부를 강조하던 학풍에서 벗어나, 공맹유학 본연의 모습인 ‘실천 유학’으로의 회귀를 강조했다. 그는 세상의 불평등과 부당함에 맞섰고, 굶주리며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대변코자 했던 올곧은 인물이었다. 급진적인 그의 철학은 당시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반동사상으로 치부되어 심한 탄압을 받았다.
양명학은 인간은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전제하고, 그에 따라 마음을 어떻게 수양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 철학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간, 나와 남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평등 세계를 꿈꾸었으며, 나아가 인간과 만물이 하나라는 ‘만물일체관’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왕수인의 철학은 당시 갈등과 반목으로 치닫던 사상계와 종교계의 장벽마저 자유로이 넘나들며 삼교(유불도) 일치론을 낳았고, 서민들에게는 어지러운 세상을 비춰 줄 한 줄기 서광으로 인정받았다. “마음속에 각인하여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실천으로 옮겼을 때만이 비로소 참된 지식인”이라고 왕수인은 말했다. ‘아는 것’보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참된 지식이요 진정한 용기라는 뜻이다.
《전습록》은 실천적 지식인이 한 시대를 살아가며 겪어야 했던 고충과 개혁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보고이다. 지금도 여전히 일상에서 실천과 개혁을 꿈꾸며 정체성을 고민하고 주체성을 찾으려는 현대인에게, 온고지신을 넘어 법고창신의 미덕을 전하는 귀중한 저작이다.
? 실천하는 지식인,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상을 주창한 양명학의 기록 《전습록》
《논어》 〈학이〉 편에는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과 마음을 반성하노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진실하지 못했던가? 친구와 더불어 사귐에 믿음을 주지는 못했던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았던가?”라는 말이 나온다. 나의 심신을 날마다 세 가지 측면에서 반성한다는 뜻이다. 하루 세 번 반성한다는 의미의 삼성(三省)에서 세 번째 내용이 바로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는다.’라는 傳不習乎(전불습호)이고, 傳(전)과 習(습)을 차용하여 만든 책이 바로 《전습록(傳習錄)》이다. 따라서 《전습록》은 앞 시대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지식을 자기 나름대로 익히고 또 공부해야 한다는 뜻을 지닌 서적이다.
《전습록》 상권은 왕수인과 문하생들 간 문답과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왕수인의 학설 가운데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知行合一) 학설 등이다. 주자학에서 벗어나 각종 비유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제자와 문하생들에게 닫혀 있던 기존 사고방식으로부터 전환하라고 독려하는 내용이 많다. 중권은 주로 왕수인이 학우나 문하생에게 보낸 서간문과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상권과 하권에 비하여 중권만이 갖는 특징은 왕수인이 직접 저술했던 논문이 실렸다는 점이다. 중권에는 양명 왕수인이 만년에 확립했다고 전해지는 학설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치양지(致良知)와 만물일체(萬物一體)에 대한 학설들이 많다. 특히 그의 문하생들이 발전시킨 유(儒)·불(佛)·도(道) 삼교 융합과 관련된 언급이 여기 중권에서 많이 보인다. 하권은 상권과 마찬가지로 왕수인과 문하생들 간의 문답이 주로 실려 있다. 중권과 하권에서는 왕수인이 기존의 전통 유학, 즉 주자학에 구속받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이론들을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렇듯 《전습록》은 본래 상권, 중권, 하권 세 권으로 구성되지만, 청소년 철학창고 40번으로 출간한 《전습록: 실천하는 지식인, 개혁을 외치다》는 원전의 병렬식 구성이 독자들의 이해에 가닿기에 힘들 것이라고 여기고 이를 고려해 그 주요 사상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을 뽑아 6장으로 재구성하였다.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 만물일체, 유불도 삼교 융합, 실천 공부론이 각각의 장의 제목이자 《전습록》을 통해 드러난 왕수인의 주요 사상이다.
심즉리는 왕수인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학설로 “내 마음이 곧 세상의 이치다.”라는 주장이다. 맹자의 양능양지설에 근거하여 왕수인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도덕심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는 시비선악의 판단 기준이 이미 인간의 마음에 갖춰져 있으니, 모든 만물의 이치와 나의 마음을 합일시킴으로써 세상 이치를 인간 중심의 주체적·능동적 입장에서 보려 했다.
지행합일은 왕수인의 학설 가운데 두 번째로 제기된 것으로, 인식과 실천의 합일을 주장하는 말이다. 왕수인은 앎과 실천이 본래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사람이라는 존재는 당연히 앎을 행동으로 표출해야 하고, 또 행동으로 나타내었다면 그것은 분명 알고 있다는 증거라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 왕수인에게 있어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과 같다.
치양지는 말 그대로 ‘양지에 이른다’ 또는 ‘양지를 다한다’라는 뜻인데, 이 역시 왕수인의 학설 가운데 핵심이다. ‘내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심즉리와 ‘앎과 행함은 하나다.’라는 지행합일, 이 두 주장을 하나로 묶어 낸 최종 결론이기도 하다. 왕수인은 치양지 공부를 위해 성의(誠意, 내 마음의 의지를 성실히 함)와 정좌징심(靜坐澄心, 고요하고 맑은 정신의 자세로 마음을 맑게 함) 등의 다양한 공부 방법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왕수인은 또한, 인간의 마음속에 천지만물과 일체가 될 수 있는 이치가 이미 존재한다고 이해했다. 즉 마음의 이치가 곧 천지만물의 이치이기 때문에, 인간과 만물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천지만물의 존재가 내 마음 가운데 존재한다고 이해한 그는 마음 밖에 또 다른 이치가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마음 밖에 천지만물이 존재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왕수인은 인간과 만물의 일체성만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 정치·사회가 설정해 놓았던 불합리한 윤리규범들까지 비판했다. 그 결과 양명학은 사회적 관계에서도 동일성과 평등성을 실현하려는 변혁과 개혁을 주장하며, 사회제도의 근대 지향성을 이끌어 낸다.
왕수인은 많은 경서 해석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경서 해석의 다양성을 주장하면서 주자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근원 주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이 곧 이치임을 강조했다. 이른바 이치만을 따지는 이학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마음에 주목하는 심학(心學)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경서로 보자면 기존 주석과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옛 서적이 남긴 문헌 자체를 고증하려는 학풍이 등장하는가 하면,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제도와 권위에도 과감히 도전하려는 호걸들이 수면 위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런 사상계의 흐름과 양명학의 정신은 종교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유·불·도 삼교 융합으로 이어졌다. 일존주의와 배타주의로 대변되는 주자학의 세계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왕수인의 마음에 대한 탐구는 바로 이런 시대의 변화, 근대 사회로의 지향과 밀접한 연관을 보였다.
? 마음의 이치를 찾아 나선 실천적 지식인이자, 양명학을 창시한 학자 왕수인
왕수인은 중국 절강성 여요현 출신으로, 왕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호방했으며, 12세에 이미 성현이 되고 싶다는 높은 의지를 갖고 공부에만 전력하는 열성을 보였다. 18세에는 선대의 학문, 즉 당시 사상계를 지배해 오던 학문인 주자학에 몰두했고, 주희의 학설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는 실증적인 학문 자세를 취하려 노력했다.
왕수인이 살던 명나라 중엽에 이르러 주자학은 르네상스와 같은 부흥기를 맞이했지만, 당시 관료 자리는 이미 꽉 차 있었고 관료 선발 인원은 점점 줄어들어 정계에 진출하기가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마치 선비인 양 행세하는 거짓 주자학자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저마다 붕당(朋黨)을 만들어 당파 싸움이 일어나는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런 가운데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지고 피폐해져 각종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혼란이 들끓었다.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자 반란 지역으로 곧장 출전했던 관료 가운데 한 사람이 왕수인이었다. 왕수인은 그곳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을 보며 당시 혼란의 원인에 대해 깊은 회의에 잠겼다. 사실 왕수인은 어려서부터 주자의 학문을 배워 남몰래 주자라는 인물을 흠모하며 성장하였다. 주자가 주창한 학설 가운데 하나가,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저마다 이치와 가치를 갖고 태어난 존재로서 인간은 이러 한 만물의 이치를 하나씩 터득해 가면서 삶의 완연한 경지를 통달해야 한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였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여기가 왕수인이 주자의 격물치지설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35세 때 환관 유근의 전횡과 횡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감옥에 갇히고 급기야 귀주 지역의 용장으로 귀양살이까지 떠나는 불운을 겪는다. 용장은 험난하고 척박한 땅이라서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매우 힘든 곳이었으나, 그곳에서 일체의 영욕과 이해득실을 초월하고 밤낮으로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지켜 가며 오직 학문 연구에만 전념한다. 그곳에서 왕수인은 주자의 격물치지설이 세상 이치와 부합하지 않음을 터득하고, 인간 본연의 마음이 갖는 주체성과 역동성, 그리고 그 마음이 본래부터 사리분별의 이치를 갖고 있다는 것에 강한 매력을 느끼며 자신만의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그는 성인의 도란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성에 자족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심즉리설을 제창한 이후 38세 때 지행합일설을 내놓았고, 이후 그의 학문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며 세간으로부터 주목받는다. 그러면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많은 지식인들에게서 공감을 얻기도 때로는 지탄을 받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왕수인은 더더욱 세밀한 사상 체계를 만들어 가며 하나의 학문을 완성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명나라 중엽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사상에 그의 호를 붙여 ‘양명학’이라 하게 되었다.
이후 왕수인을 스승으로 모시는 여러 제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명나라 중엽 당시에 자본주의가 이미 싹을 텄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분제 사회가 동요하는 분위기였다. 더불어 주자학에 발판을 두었던 통치 이념과 체제로는 더는 안정된 사회를 꿈꿀 수 없었으며, 체제 유지마저 보장받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양명 왕수인의 사상은 많은 지식인 계층으로부터 공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민층으로부터 지지를 얻기까지 하였다. 그의 철학이 성공을 거두었든 실패로 끝났든 간에, 봉건 체제에서 새로운 고민거리를 수면 위로 드러낼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양명 왕수인의 철학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그는 관리로서 여러 벼슬을 도맡기도 했는데, 마을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향약(鄕約)을 통하여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는 낡은 풍속과 잘못된 관습을 바꾸려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여했다. 이후 그는 강학 활동에 전념했고 많은 강의와 열띤 논쟁들이 이루어졌는데, 그의 제자인 설간(薛侃)이 양명 선생의 강의록과 서간문 등을 엮어 《전습록》을 간행한다. 왕수인의 나이 47세 때의 일이다.
57세 되던 1528년 왕수인은 왕명을 받아 어느 지방의 민란을 평정하러 떠났다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병을 얻어 11월 강서성 남단에 있는 남안에서 일생을 마친다. 세상을 떠난 뒤 왕수인은 1567년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학설을 재해석해 가며 스승의 어록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 과정에서 《전습록》이 탄생했다. 따라서 《전습록》은 양명 왕수인의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기초 자료이며, 그만큼의 충분한 가치가 담긴 저작이라 하겠다.
? 《전습록》의 현재적 가치는자유로운 사고와 평등한 인간관계, 호혜정신이다
《전습록》은 당시, 자신만이 옳다며 케케묵은 교리와 신념을 내세우는 기득권 사상에 도전하려는 의지의 서적이었다. 또한 거의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버틸 수 있는 벽을 향해, 세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일깨우려 부르짖는 외침의 소리가 담긴 보고(寶庫)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의 고뇌가 담겨 있는 조용하면서도 웅지를 내포한 기록물이었다. 있어 왔던 전통에서 벗어나 있어야 할 학문으로의 새로운 도약을 지향하고자 했던 왕수인의 사상은 사상계의 갈등과 종교계의 반목마저도 뛰어넘어, 서로의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을 찾고자 노력했던 불씨와도 같았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지의 주체성과 역동성에 따라 올곧은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낡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여성의 재혼과 사농공상의 계층 간·계급 간 갈등 구조의 해결 방안 모색 등은 그가 온 천하에 보여 주고자 했던,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양지와 양능을 대변하고 싶은 의지와도 같았다.
그의 이러한 근대 지향적 사유는 문하생들에게 전수·계승되었고, 청나라 말기에는 강유위·담사동 등의 개혁론자들에 의해 대동사상의 한 축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전습록》 안에 담보되어 있는 왕수인의 사상은 근대적 인간상의 실현을 추구하는 개혁성마저 엿보인다. 그의 사상 속에 담긴, 근대적 인간이 지녀야 하는 자유로운 사고와 평등한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다는 호혜정신이야말로 《전습록》이 지닌 현재적 가치일 것이다.
‘틀림’의 강조보다는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고가 여전히 필요하다. 약 2600여 년 전의 공자 시대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남을 비판하는 능력 못지않게 서로를 수용하고 포용하며 더 합리적인 성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지식인의 역량이 강화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기존 질서에 안주하며 기득권에 기대어 살기보다는 만인을 모두 끌어안는 성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왕수인의 생각이야말로, 부정과 부패, 그리고 안주와 이기주의에 익숙한 우리 자신에 대한 질책이자 채찍일 것이다. 왕수인은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해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올바르게 머물 자리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한 생각이야말로 밝은 사회, 갑질 없는 사회,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사회를 향한 소중한 희망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전습록》을 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청소년 철학창고 《전습록: 실천하는 지식인, 개혁을 외치다》로 만나는 양명학
《전습록》은 중국 명나라 때, 봉건 신분 체제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지며 독창적인 학설을 제창했던 양명 왕수인의 어록을 정리한 기록물이다. ‘청소년 철학창고’ 마흔 번째 책으로 출간된 《전습록: 실천하는 지식인, 개혁을 외치다》는 원래 상권, 중권, 하권 세 권으로 되어 있고 주제적 흐름이 아닌 순서적 병렬 구성으로 이루어진 원전이 독자들의 이해에 가닿기에 힘들 것이라고 여기고 이를 고려해 그 주요 사상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을 뽑아 6장으로 재구성하였다.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 만물일체, 유불도 삼교 융합, 실천 공부론이 각각의 장의 제목이자 《전습록》을 통해 드러난 왕수인의 주요 사상이다. 6개의 장별마다 주요 내용을 개괄해 놓았고, 각 소절마다 해당 주제에 부합하는 소제목을 붙여 당시 철학 논제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원전의 본뜻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역하였다. 무엇보다 책 말미에는 왕수인의 생애와 시대상, 《전습록》의 탄생 배경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해설을 실었다. 방대한 분량과 심오한 내용이 장벽이 되어 《전습록》을 읽으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던 일반인과 청소년들에게 주제별 내용 선별과 구성, 쉬운 번역과 각 원전 번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풍성한 해설을 갖춘 ‘청소년 철학창고’ 40번 《전습록: 실천하는 지식인, 개혁을 외치다》의 출간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양명학 전문가로서 양명학에 관한 논문과 저술 활동을 펼쳐 온 김용재 교수의 전문가적 역량이 이번 책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에 단순히 ‘쉽다’로만 정의할 수 없는 내용의 ‘깊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주자학과 다른 양명 왕수인의 사상, 그리고 그것의 결정체인 《전습록》을 알고자 했던 독자들이 《전습록: 실천하는 지식인, 개혁을 외치다》를 통해 마음에 와닿는 독서를 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