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게 시대는 무엇이고, 나라는 무엇인가. 역사는 진보하는가, 반복하는가. 진리란 무엇이고, 권력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자의인가 타의인가.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이고, 세상으로부터 숨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리석다는 것은 무엇이고,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깨닫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시간의 어깨 위에서 실로 오래도록 반복돼 왔던 질문이고, 또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는 질문들이다. 이 책의 저자 송광룡 씨(『금호문화』 기자)도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또 역사의 긴 나무그림자를 향해 던졌다.
이 책은 이 질문이 헤매고 다닌 자리의 지리서다. 혹은 시가 그려져 있는 역사의 지도. 그런데 그 자리는 당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낙향, '남겨진 삶'을 담담히 견디며 학문을 했던 지식인들의 은둔처다. 그곳은 주로 반도의 남단 호남에 몰려 있었다. 저자는 그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그는 이름 없는 들꽃 위로 바람만 하릴없이 오가는 그곳의 옛 주인들과 대화했다….
스승인 조광조가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급기야 사약을 받게 되자 곧바로 낙향,평생을 처사(處士)로 살았던 양산보(梁山甫.1503∼1577)와 소쇄원(瀟灑園·전남 담양군 남면), 인종의 죽음 이후 스스로를 고향으로 유배시킨 호남 성리학의 종장(宗匠) 김인후(金麟厚.1510∼1560)와 그의 학문적 본거지였던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황룡면), 퇴계 이황과 논쟁을 벌여 조선유학의 정수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발전시킨 기대승(寄大升.1527∼1572)과 폐허뿐인 낙암(樂庵·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이 외에 혁명적 사상가인 정여립(鄭汝立·?∼1589)과 그가 활동본거지로 삼았던 전북 진안의 죽도(竹島),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의 희생자 정개청(鄭介淸.1529∼1590)과 그의 자산서원(전남 함평군 엄다면), 강항(姜沆.1567-1618)과 전남 영광의 염산 앞바다, 윤선도(尹善道.1587-1671)와 그의 마지막 은둔처인 보길도, 호남실학의 3걸 중 하나로 꼽히는 위백규(魏伯珪.1727-1798)와 그의 고향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마을 등, 모두 11명의 상처 입은 지식인과 그들의 터가 거론되고 있다.
'문화유산답사기' 류에서 '역사'가 특히 부각된 역사기행산문집이다.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시인이고 기자지만, 역사학자들의 사료를 충분히 검토하고 숙지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와 불화(不和)한 기린아(麒麟兒)들의 페이소스를 읽는 맛이 쓰고, 그곳의 풍광과 풍광에 깃든 뜻, 그것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심사에 대한 서정성 깊은 묘사도 일품이어서 문학과 역사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들추어 볼 만한 책이라 하겠다.
송광룡
1964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된 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금호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금호문화』 기자로 일하면서 전통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고 있다.
삶의 전환점, <양산보와 소쇄원>
확연의 경지, <김인후와 필암서원>
진정한 논객, <기대승과 낙암>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정여립과 죽도>
권력의 사슬, <정개청과 윤암산>
은둔의 미학, <윤선도와 보길도>
변방의 삶, <위백규와 방촌>
눈부신 실존, <정약용과 다산초당>
구도의 길, <초의선사와 일지암>
마지막 선비, <황현과 매천사>
고난의 삶 살은 선비들 이야기
조선이란 나라는 중앙집권 국가이면서도 지방분권적 색체를 띈 묘한 국가였다. 충과 효를 사회기강의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 왕은 강력한 중앙집권의 정치적 당위성을 얻는다. 그런데 왕도정치란 말은 중앙집권을 의미하지 않으니 이상하다. 왕도는 왕이 최고가 아니라 왕이 가야 할 길, 그것은 왕의 권위보다 왕의 의무를 강조하는 지방분권적 사고다.
‘역사에 지고 삶에 이긴 사람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 선비들은 역사에 전면에 나서지 않은, 혹은 중앙에서 패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묻힌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향기로운 것은 정권에서는 패했어도 역사에서는 패하지 않았던 선비정신이 묻어있기 때문이리라.
‘유배의 땅에 머물렀던 조선 선비들의 삶과 여정’이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선비들만 다뤘다. 귀양가고 사약받았다고 모두 죄인일 수 있는가. 오늘날 굳이 따지자면 양심수 정도가 될 듯한 선비들, 예를 들면 소쇄원에 평생 은거한 양산보, 호남의 논객 기대승, 반역자로만 볼 수는 없는 정여립, 보길도에 은둔한 윤선도, 귀양중 목민심서를 저술한 정약용, 국운의 기울어감을 한탄하며 자결을 택한 황현의 매화같은 삶과 그들이 머물던 곳의 흔적이 은은하게 우리의 가슴에 스며든다. 아름다운 사진들과 유려한 글이 선비들의 삶과 어울려 읽는 맛을 더한다.
-<조선일보> 김태훈 기자(2000/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