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은 우리의 의식과도 같은 거야. 진실을 말해 주는…….”
누군가 거울을 믿지 말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디선가 이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뇌리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나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일 뿐이다. 백만 분의 일 초가 아무리 짧아 보여도 시간은 시간인 법. 하늘에 떠 있는 별빛이 수백만 년 전에 발산되어 별이 죽고 나서야 지구에 도달했듯이, 거울 속에 투영된 얼굴 또한 반사되어 오간 끝에 도달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거울을 통해 언제나 백만 분의 일 초 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본문 중에서-
해답 없는 질문, 자기 자신과 몸 그리고 감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가득 찬 열여섯 사춘기 소녀 마리사.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에게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아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고통을 느낄 뿐이다.
익숙하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겉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외면하고 싶기도 한 거울. 풀빛 청소년 문학에서 여덟 번째로 선보이는 책 《거울 너머의 나》는 거울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열여섯 살 소녀가 겪는 성에 대한 고민과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학창 시절 누구나 경험해 봤을 법한 단짝 친구와의 우정과 이성에 대한 성적 호기심에 대해서 과도하게 멋 부리지 않고 차분하게 사실적인 표현들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또한 사건과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쌓여가면서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매우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거울 너머의 나》는 일견 전형적인 청소년 성장 소설로 보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주인공 마리사는 누구나 겪은, 아니면 겪고 있는 사춘기의 모든 특징을 대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춘기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고민의 대상으로 만든다. 가족, 친구, 진로, 사랑 그리고 성(性)까지도.
한국 정서상 성 문제를 거리낌 없이 논하기란 쉽지 않다. 아직 미성년자인 청소년의 성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청소년이야말로 성에 대한 관심이 높고 그만큼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데도 말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청소년을 위한 성 지침서는 시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청소년이 느끼고 고민하는 것을 ‘공감’해 주는 책은 찾기 힘들다.
이러한 의미에서 《거울 너머의 나》는 우리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준다. 저자는 때로는 적나라하게, 또 때로는 담담하게 사춘기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의 대사 하나하나에, 저자가 3인칭 관점에서 서술한 말 하나하나에 사춘기 청소년의 고민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의심할 생각조차 못했지.
성(性)은 스스로 깨어나 내가 그걸 사용할 때까진 생각해 보지 않는 주제니까.”
포옹이 다시 강해졌다. 마리사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감은 눈앞에 아말리아가 보였다.
발타사르와 함께 있는 아말리아도 마찬가지일 거다. 어쩌면 홀딱 벗고 다시 그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리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리사는 왜 아말리아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자신의 몸이 지금껏 상상도 못한 가장 완벽한 남자의 품 안에 있는데도? 마리사의 마음은 무엇일까?
-본문 중에서-
하지만 이 책을 평범한 청소년 성장 소설로만 단정 짓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는 특별한 여고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친한 친구인 아말리아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고 힘들어 하던 마리사는, 남자친구인 루이스 엔리케와의 잠자리 후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친구로서의 사랑이 아닌 여자로서의 사랑.
한국의 많은 청소년 문학들이 성이라는 소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꺼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동성애라는 주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스페인을 비롯한 25개국 국가에서 작품이 번역되며 수많은 청소년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인기 작가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조르디 시에라 이 파브라는 때로는 무채색 같이 느껴질 만큼 담담한 어조로 동성애라는 이야기를 매우 솔직하게, 그러나 무겁지 않게 돌파하고 있다. 이 ‘부담스러운 이야기’는 주인공 마리사의 내적 성장과 잘 어우러져 있어서 독자들은 동성애 또한 성장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결론을 모르고 책을 읽는다면, 이것이 단순한 청소년 성장 소설인지 아니면 동성애를 다룬 소설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청소년 성장기 중의 한 과정처럼 지나기도 하는, 동성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시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이 책의 주제가 어느 쪽인지 달라질 수도 있다. 《거울 너머의 나》가 청소년 성장 소설인지, 동성애를 다룬 소설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지은이_조르디 시에라 이 파브라
194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조르디 시에라 이 파브라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중남미의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추천하고 찾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25개 국가에서 번역이 됐으며, 지금까지 7백만 부 이상이 팔렸다. 지칠 줄 모르는 여행가이자 음악 전문가로서, 작가로만 분류되기 어려운 저자는 모든 장르를 성공적으로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스무 차례 이상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가장 유명한 상으로는 네스토르 루한 상, 세비야 아테네오 상, 호아킴 루이라 상, 라몬 문타네르 상, 바르코 데 바포르 상(2회 수상), 콜룸나 호베 상, 그란 앙굴라르 상(3회 수상), CCEI(스페인 가톨릭 아동 문학상, 3회 수상) 등이 있다.
www.sierraifabra.com
옮긴이_김영주
덕성여자대학교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교 국제회의통역 석사를 취득했으며 통번역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스페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주요 역서로는 《뒤샹은 왜 변기에 사인을 했을까?》, 《조금 느려도 괜찮아》, 《수학암살》, 《비욘드 시크릿》,《스티커 토끼》 등이 있다.
해답 없는 질문, 자기 자신과 몸 그리고 감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가득 찬 열여섯 사춘기 소녀 마리사.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에게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아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고통을 느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학교 선배 루이스 엔리케의 적극적인 권유로 연극 무대를 경험하고, 그와 사귀게 된다. 자신과 단짝처럼 지내던 아말리아에게도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마리사는 아말리아와 자신과의 사이에서 알지 못했던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마리사는 괴롭다.
베르베나 축제의 밤. 루이스 엔리케와 잠자리를 같이 한 마리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결국 자신을 어디선가 늘 지켜봐 오던 연극 선배 푸엔산타를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는다. 통과의례와도 같은 교내 연극과 베르베나라는 성인식 축제라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마리사는 이제 세상 속에서 보다 당당해진 자신과 마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