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사라졌다,
그러나 무용총은 남았다!
고분벽화에서 무엇을 읽고 설명할 수 있는가?
왜, 무엇을, 어떻게 그리며 후세에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1500년 전 벽화에 새겨진 고구려를 한 장면 한 장면 다시 만나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우리 역사와 문화의 남은 흔적 가운데 가장 생생한 현장 기록이다. 고구려 화가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일상에 ‘죽은 이는 어떤 세상에 살게 될까?’를 상상하여 더한 결과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공감되고 공유되던 장면이 그림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진 경우이다. 그러나 15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기만 했던 그들의 하루, 낯익은 모습 가운데 우리에게 낯설거나 아예 생소하게 된 부분도 있다. 게다가 지난 수십 년 사이에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관념은 그 이전을 이해하거나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달라졌다. 실제 고구려 고분벽화의 어떤 장면은 재발견이 이루어진 직후인 20세기 초에도 이미 읽기가 어려운 상징기호에 가까웠다.
다시 100년이 흘렀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했던 고구려 고분벽화의 다른 장면들도 상징기호에 가까워지고 있다. 다음 세대의 어떤 이들에게는 벽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고대 이집트의 그림문자에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런 거리감을 좁히고 이질감을 뭉그러뜨리는 의미 있는 징검다리가 되고자 쓰였다.
무용총은 어떤 유적이고, 왜 무용총 수렵도인가
무용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에 있다. 우산 남쪽 기슭의 완만한 구릉 위에 자리 잡은 2기의 고구려 시대 흙무지돌방벽화무덤 가운데 북쪽의 것이다. ‘무용총’은 1935년의 최초 조사 당시 널방 동남벽에서 발견된 춤추는(무용) 장면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이다. 1935년 처음 발견된 뒤 수십 년 동안 실측과 정비?수리?재조사가 이루어졌고, 2004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적이다.
고구려 흥망의 역사의 한 자락에 놓인 국내성 일대에서 운 좋게도 살아남은 무덤 무용총. 5세기에 축조된 이 벽화고분은 고구려 건국 터전 중심의 북방 문화, 고구려 사회의 전통과 습속을 잘 담아낸 고분벽화, 기마사냥이 이루어지는 산간계곡과 들판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낸 고구려 화가의 솜씨, 벽화로 읽어낼 수 있는 고구려인의 관념과 시야, 의식주, 사냥감과 사냥 도구를 읽어내게 하는 단서를 담고 있다. 당시를 유추하게 하는 여러 고분 중에서도 무용총은 사냥 장면, 무용 장면, 선인, 승려, 종교적 의미의 연꽃과 하늘, 별자리 등 다양한 내용의 벽화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어 현시점에서 고구려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이다.
그렇다면 왜 무용총의 많은 벽화들 중 ‘수렵도’를 주목해야 할까.
“고구려 고분벽화는 제대로 남아 있는 게 드물어요. 벽화고분이 지금까지 123기 발견되었지만, 벽화 보존 상태가 좋고,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유적은 유명한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벽화분,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 대략 20기 정도죠. 무용총도 벽화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유적 가운데 하나예요. 그런데 다른 벽화고분과 달리 무용총 벽화는 발견?조사되었을 때와 현재의 보존 상태의 차이가 매우 커요. 발견된 뒤 가장 빨리, 심각하게 벽화가 변형되고 사라진 경우라고 할까요. 특히 수렵도는 벽화의 훼손 정도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요. 고구려인의 기상이랄까, 문화와 관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벽화인데, 안타깝게도 너무 많이 변형되었어요. 의식주와 산천 경관을 포함하여 사냥 장면에 담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지리?관념?종교 신앙에 대한 학술 정보가 대단히 많지만, 훼손된 벽화조차 앞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죠. 그나마 지금 상태에서라도 벽화가 말하고 전할 수 있는 걸 최대한 기록하고, 공유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다.
저자는 무용총 수렵도에 초점을 맞춰 유적의 발굴과 조사, 벽화의 훼손과 복원 과정을 애틋한 마음을 담아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상세하게 다루면서 보존에 대한 염원을 보탰다. 일련의 시간의 흐름을 담은 벽화 한 장면 한 장면을 펼쳐 보이면서 1500여 년 전 고구려 사람의 눈빛과 숨결을 하나하나 꺼내 놓는다. 마치 어린아이를 보듬어 안듯 저자의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질로 정리된 벽화들은 각각 작은 이름표를 달고 차례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유적-사냥-사람-풍경-기법, 다섯 주제 아래 펼쳐지는 고분벽화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는 벽화와 고분을 읽고 풀며 함께 알아낼 수 있는 적지 않은 역사문화 정보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그림과 사진을 보면서 글을 읽는다면 이해도도 높아지고 관심 역시 더 커지리라고 독자 입장에서 구상하고 집필했다. 주제에 따라 그림을 먼저 보여주고 그에 대한 글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편집하여, 지식 전달 위주가 아닌 말 그대로 이미지 읽기에 가깝게 했다. 수십 개의 꼭지를 병렬로 나열하되 다섯 개의 큰 주제 아래 묶어 정렬하였다.
1부는 유적 자체에 관한 것으로, 무용총이라는 고구려 벽화고분에 무엇이 그려졌고, 한 장면 한 장면을 어떻게 읽고 설명할 수 있는지 말한다. 또한 유적이 훼손되고 복원되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상태에 이른 과정을 개괄한다. 2부는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사냥 장면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사냥터, 짐승, 활과 화살, 말 등의 소재에 대한 설명부터 이들이 모여 큰 화면을 이룬 사냥도를 감상하는 법까지 아우른다. 3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벽화에 등장하는지, 등장하는 사람의 옷과 모자, 신발 등이 당시의 정치와 사회문화적인 특징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살펴본다. 4부는 산, 나무, 구름 등으로 이루어진 풍경 이야기다. 서로 다른 풍경이 유적지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어떻게 보이고 묘사되는지 알게 하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5부는 벽화의 기법을 다룬다. 벽화를 주문한 사람, 주문을 받고 벽화를 그린 사람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완성된 벽화의 기법과 그린 사람의 혼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다섯으로 나눈 분류는 독자에게 벽화 하나를 놓고도 다층적으로 해석하는 힘을 갖게 만든다. 그저 벽화의 소재가 무엇이고 그 소재를 보면서 단순히 고구려 시대가 이렇겠거니 상상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게 한다. 우리가 마주한 벽화가 어떤 출발선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꿰뚫어 보게 하면서, 하나의 소재가 다른 소재들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 속에서 1500년 전 고구려가 담고 있던 생명과 공존의 양상을 한꺼번에 호흡할 수 있게 돕는다.
벽화의 주문부터 발굴과 조사, 복원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고구려의 한 장면
“고분벽화는 주문을 받아 그리는 그림이다. 당연히 주문한 사람이 있고 그리는 사람이 있다. 주문한 내용이 있으며 그리는 솜씨와 습관이 있다. … 주문한 이가 믿는 저세상에 대해 알려진 것, 상상으로 묘사되거나 종교 경전에 표현된 모습이 그림의 바탕이 될 수도 있다. … 벽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은 특정한 용도와 기능에 맞춘 공예화이다. … 화가는 어떤 유형을 택할지 결정할 수 있고 세부적인 수정도 가능하다. … 색의 선택과 배열, 무늬의 종류 및 배치 등도 화가의 손에 달려 있다. 벽화에는 그 시대에 공유된 화법과 화가 개인의 필력이 함께 담긴다. (중략)
고분벽화는 제작 이후, 오랜 기간 어둠 속에 있다가 재발견과 조사를 거쳐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 벽화고분에 들어간 조사자는 벽화의 어떤 부분이 어떤 상태로 남아 있는지를 꼼꼼히 들여다본다. 이어 벽화 내용에 대한 이해도 시도한다. 가상 복원 형식으로 원형 추적에 나서기도 한다. … 종횡으로 여러 분야의 정보와 지식이 조합되면서 벽화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벽화의 보존 상태가 시간의 흐름, 환경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듯이 벽화 해석이 더 구체적으로 되거나, 때로 내용이 바뀌는 것도 벽화 연구의 한 과정이다. 벽화 이해는 벽화 발견 이후 벽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본문 44~46)
고분벽화에는 주문을 한 사람이 있고, 주문을 받아 그리는 사람이 있다. 발견된 벽화고분에 들어간 조사자가 있고, 벽화를 복원한 사람이 있다. 1500년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이 더디고 짧게, 혹은 뭉텅이로 한꺼번에 이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여러 기술에 의해 복원된 모습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고분벽화이다. 저자는 벽화를 주문하고 그 주문에 따라 그린 사람의 심정을 헤아린다. 그림이 그려진 뒤, 천년의 세월이 지나 조사의 문이 열리고 벽화고분이 세상의 빛과 공기에 맞닿는 순간부터 잃어버리게 된 것과 남아 있는 것 사이에 생긴 틈을 살펴본다. 그런 뒤에야 온전히 벽화 안에 담긴 사실에 가닿을 수 있지 않겠는가? “왜,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가?” “고분벽화에서 무엇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가?” “후세에는 어떻게 이해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벽화 복원의 역사 전체를 훑어 정답과 만날 수 있다면, 벽화가, 고구려가, 고구려 사람이 되살아나게 된다는 믿음이 그로 하여금 첫걸음을 내딛게 했다고 할까?
무용총이 발견되어 조사되면서 이루어진 각 장면의 이해는 유적 연구의 역사이자 고구려 문화사 복원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사, 삼국시대사, 한국사, 동아시아사, 아시아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 미술사, 동아시아 미술사, 세계 미술사의 일부로서 한국 벽화사의 한 가닥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고 천착해 온 고분벽화 전문가 전호태 교수의 섬세하고 탄탄한 접근은 벽화 한 장면에 담긴 파노라마처럼 흐르는 1500년이라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산은 산이고 사람은 사람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체 그 산은 누구의 시선으로 어떤 순간에 무엇을 위해 펼쳐진 산인가, 고구려와 현재를 잇는 긴 시간 속에 점점이 놓인 망점을 각진 프리즘 사이로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그것이 만약 훼손되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면 그 훼손의 다양한 이유와 원인조차 벽화를 보는 사람에게는 해석의 실마리이자 숙제로서 묵직하게 다가온다. 전호태 교수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벽화 속 산은, 구름은, 남자는, 여자는, 연꽃은, 동물은… 그래서 단순히 A=B라는 공식에 묶이지 않는다. 감히 그럴 수 없음을 연구자는 연구의 깊이가 깊어진 만큼 더욱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부정확성의 여백이야말로 이 책이 갖는 의미이다.
우리는 후손으로서 천 년의 시간이 담은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벽화는 그 수많은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역사의 작은 조각이다. 그 파편에서 무엇을 보는가. 보아야 하는가. 《무용총 수렵도》는 짐작도 어려운 까마득한 세월 저편에 대한 생생한 고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