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삶을 떠받칠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
《제3의 장소》(원제 The Great Good Place)는 제1의 장소인 가정, 제2의 장소인 일터 혹은 학교에 이어,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제3의 장소의 중요성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의 10년 연구가 담긴 도시사회학의 결정판으로서, 발간 이후 여러 분야에서 도시 환경과 거주민의 삶의 관계를 활발하게 분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은 가정이나 일터에서 주어지는 사회적 역할만으로는 본연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정과 학교, 또는 일터 밖에서 다른 교류 활동을 추구한다. 레이 올든버그는 이를 ‘비공식적 공공생활’이라고 칭하고, 여기에 필수적인 요소인 공간을 ‘제3의 장소’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삶의 중요한 요소이면서도 이용자는 거의 의식하지는 못했던 ‘장소’의 사회적 가치를 발굴해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로써 현대인이 앓고 있는 공동체 상실이나 고독감 같은 문제들의 원인이 제3의 장소의 쇠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거주민의 의견과 그들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도시계획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는지를 고찰하면서, 바로 이 지점에서 제3의 장소를 복원하고 공동체를 되살릴 희망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제3의 장소》는 1989년 초판이 출간되자마자 같은 해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올해의 책’으로 선정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이후 사회학자, 기업가, 도시계획가 등은 물론 도시 거주민에게 영감을 주었고, 도시사회학의 중요한 저작으로 자리 잡았다. 풀빛에서 출간한 《제3의 장소》는 1999년 개정판이다. 시간적 거리감이 무색할 만큼, 책이 묘사하는 상황은 현재 우리나라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대로 일치함을 느낄 수 있다. 획일화·대형화를 추구하는 도시계획 및 건축, 공공시설 축소, 공동체 상실, 작은 가게들이 맥없이 사라지는 현상 등을 겪으며, 우리 사회도 많은 부작용을 겪는 중이다. 나이 든 세대와 어린 세대가 어울릴 만한 곳이 없고, 계층 간 갈등은 심해졌으며, 거주민들이 스스로 논의하고 의사 결정을 하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공동체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 힘들다. 가정과 일터라는 두 디딤대만을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삶의 전부일 수는 없다. 최근에는 독립서점, 마을공동체,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카페 등 현대판 제3의 장소들이 등장하고 있다. 제3의 장소라는 개념은 몰랐더라도 그 중요성과 필요는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제1, 제2의 장소에 이어 제3의 장소라는 삼각대를 굳건히 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책은 주어진 환경에 불편을 느끼고,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를 거부하는 시민 자신에게 제3의 장소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곳을 제3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가?
자기계발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제3의 장소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저자 자신도 그런 견해와 자주 맞닥뜨렸다. 어떤 이는 제3의 장소를 가정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도피처, 도덕관념이 흐려지는 곳 정도로 인식하기도 한다. 가까운 거리에 단골 술집이 있다고 해서 그 장소를 ‘제3의 장소’라고 보는 데에는 저자 자신도 반대한다. 그래서 레이 올든버그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제3의 장소의 특징과, 제3의 장소만이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제3의 장소는 지역사회를 구축하는 기능을 한다. 이와 관련된 기능으로 ‘통합’이 등장한다. 제3의 장소가 활발한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모두 서로를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공동의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고, 누구에게 어떤 정보가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둘째는 ‘동화’다. 이사 온 새 이웃은 물론이고, 국경을 넘은 이주민 등 새로운 인물을 지역이 받아들이게 하는 기능이다. 국경이나 문화적 배경을 넘어 유목민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진 현대 사회에서 이는 매우 중요하다. 세 번째는 ‘분류’의 기능이다. 제3의 장소에는 아무 거름망 없이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다. 그러다 결국 서로 통하는 지점을 찾아내 다른 형태의 모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네 번째 기능은 ‘본부’다. 지역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중요한 사고에 대응해야 할 때 제3의 장소는 집단적 행동의 거점이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귀중한 기능은 어린 세대와 나이 든 세대가 함께 어울리게 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건축과 도시계획은 이 두 계층을 분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과거에는 이들이 서로를 돌볼 수 있었던 반면에, 현대 사회는 노인이나 아이 등 약자를 돌봄이 필요한 수혜자로 전락시켰다. 적절한 제3의 장소가 있었다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챙길 것이고, 이는 그 어떤 복지제도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핵심이자 기본적인 기능은 ‘재미’다. 재미는 주로 대화에서 발생한다. 제3의 장소 밖에서 어떤 지위를 갖고 있든, 제3의 장소 안에서는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된다. 이 외에도 제3의 장소는 정치적 토론, 지적 토론의 장이고, 때로는 사무실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장소를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만 접할 수 있다면? 차를 이용할 수 없는 계층은 소외되고, 가정이나 일터에서의 스트레스에 지친 사람은 더욱 집 안으로 파고들 것이다. 그래서 제3의 장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은 ‘근접성’이다.
어떤 이들은 제3의 장소가 구시대의 유물이고, 사생활을 중시하는 현대의 라이프스타일은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 헤어 나오려는 투쟁으로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생각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지역공동체라면 이런 형태의 삶을 ‘지양’하는 사람이나 ‘지향’하는 사람이나 둘 다 선택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제3의 장소를 원하는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다.
제3의 장소가 사라진 자리, 원자화된 현대인
제3의 장소가 쇠퇴했을 때 일어나는 첫 번째 문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집 안으로 피신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 안에서 마치 그것이 ‘구시대와의 투쟁의 산물’인 것처럼 고독감과 소외감을 ‘누리고’ 있다. 수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제3의 장소》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주거환경, 나아가 이러한 주거환경을 만든 건축과 도시계획 문제를 짚었다.
저자는 미국에서 비공식적인 공공생활이 쇠퇴하고 제3의 공간이 황폐해진 시기를 제2차 세계대전 직후라고 분석한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 도시계획가는 실제 거주자보다 우위에 서서 수익성 위주로 주거단지를 계획하고 건설했다. 공공시설을 축소하고 도로망을 위주로 한 토지구획은 사람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도, 사람들이 모일 만한 장소도 없”(14쪽)는 환경에서 살게 만들었다. 공동체를 잃은 거주민들은 변화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와도 부딪쳤다. 공공생활이 쇠퇴하여 가정과 일터(혹은 학교)의 비중이 삶에서 큰 몫을 차지하게 되자, 사회는 과거보다 거기에 한층 무거운 책임감을 부과했다. 그렇게 제1의 장소와 제2의 장소가 더욱 탄탄해졌을까? 저자는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비공식적 공공생활이 없으면, 사람들은 대신 일과 가족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지역공동체가 없어서 부족한 부분을 충족하려다 보니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 과하게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중압이 가져오는 결과는 확연하다. 가족의 해체와 악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날 중산층 가족의 수준은 1960년대 저소득층과 비슷하다. _51쪽
결혼이나 가정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창구를 갖지 못한 채 사회적 역할에만 충실해야 했던 사람들은 집 안에 오락시설을 들이거나 정신과의사를 찾는 식으로 돌파구를 찾거나, 혹은 자신의 자기계발 노력이 부족함을 탓해야 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과거보다 돈을 더 많이 들이면서, 그다지 재미도 없고 익숙해지기만 할 뿐이라 자꾸 새것을 찾게 만드는 홈 엔터테인먼트에 집착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공공시설에서 누렸던 즐거움을 이제는 집에서, 돈을 들여, 혼자 혹은 친구 몇몇만 겨우 초대해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사회는 이를 ‘편리함’으로 포장했고, ‘부를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지역사회에는 좋을 것이 없지만 ‘산업’에는 도움이 되는 방식이다.
지역공동체에 꼭 필요할뿐더러 제3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공공생활의 핵심인 ‘목적 없는 접촉’과 폭넓은 대인관계는 놀라울 만큼 잠식되었다. 이렇듯 잘못된 건축과 도시개발은 그곳의 거주민들을 고독하게 만들고,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주며, 원자화를 촉진한다. 가정이나 일터에서 잠시 벗어나 ‘교류하고자 하는 욕구’를 해소하는 행위를 죄악시하고, 개인이 ‘자기계발’의 세계로 들어서게 한 것은 ‘장소’의 문제였다.
자기계발서는 개인이 삶을 얼마나 즐길 수 있고, 어떤 경험을 얼마나 폭넓게 할 수 있는지가 그를 둘러싼 집단적 삶의 질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흐린다. _420쪽
제3의 장소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부유한 미국인이 사적 영역에서 향유하는 편의시설이나 여가시설과 비교하면, 공공시설의 여건은 ... 훨씬 더 나빠졌다.”(328쪽) 몇십 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거리로 나가 스스로 다른 아이들과 놀았다. 그럴 만한 공간도 있었고, 한 동네에 사는 주민들이 하나같이 아이들을 지켜보는 ‘눈’이 되어주었다. 보호자는 아이들이 잠시 보이지 않더라도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고,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아이들은 동네 놀이터 대신 ‘키즈 카페’에 가고, 노키즈존을 피해 식당을 전전한다. 노인은 젊은 세대가 드나드는 가게에 접근하지 않고, 젊은 세대도 노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술 한잔 시켜놓고 종일 앉아 떠들거나, 아무것도 사지 않고도 의자에 앉아 동네 사람들과 이런저런 정보를 나눌 수 있던 가게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실 상업시설은 걸터앉을 공간부터 치워버렸다. 도시는 자동차를 이용하는 도시 중산층 위주로 계획되었고, 이들은 과거보다 즐거움을 누리는 데에 훨씬 많은 돈을 쓴다. 물론 과거에도 성별이나 소득 수준, 혹은 사회적 계층에 따라 이용 가능한 장소가 분리되었던 적이 있다. 그런 시절을 우리는 마치 ‘구시대’의 모습이라도 되는 듯 바라보지만, 지금 처한 현실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이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배신이다. 우리는 이토록 삶이 황폐해진 이유가 산업화라든가, 구시대와의 자연스러운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식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우리가 맞서야 할 또 다른 적의 정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3의 장소 혹은 더 일반적으로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위해 별도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힘이 빠진다. 대다수 사람들은 남는 시간도, 남는 에너지도 없다. 그러나 미국인도 결국에는 도시에서의 삶이 이렇게 빠르고 바빠진 원인이 현대성이 아니라 도시계획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여 가장 기본적인 것들도 포기하게 만든다. 풍경 전체에 넓게 흩어져 있는 존재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기란 혼자 가볍게 여행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어렵다. _414~415쪽
우리에게 복원의 가능성이 있는가
“우리는 사소한 편리함을 핵심적인 편리함과 혼동함으로써 편리한 사회에 산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415쪽) 그러므로 우리는 전동 오프너가 주는 편리함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돕게 되는 공동체의 편리함을 회복해야 한다. 멀리 나가 돈을 써야만 재미를 얻을 수 있으니 차라리 집에 틀어박히기를 택하는 대신, 거리로 나가 이웃과 가볍게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에는 ‘장소’가 필요하다.
인간은 거주 환경에 큰 영향을 받지만, 환경은 인간이 통제한다. 그러므로 희망은 도시 생활에서 ‘불편’을 불편으로 느끼는 거주민 자신에게 있다. 건축물에 단일 기능만을 추구하고, 공공성을 미루고 수익성을 우선시하며, 우리의 아이를 소비자로 키우는 데만 관심이 있는 도시계획자, 기업가, 건축업자들은 개인에게 불편의 책임을 덧씌울 것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딱 맞는 캠프를 제때 예약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어울려 놀 수 있는 공간을 빼앗은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거주민의 형편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건조한 이들에게 맞서야 한다. 복원의 가능성은 거기에 있다.
이 책의 구성
《제3의 장소》는 3개의 부와 1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이상적이고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비공식적 공공생활’의 상과 어떤 장소가 제3의 장소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조건 및 특징을 담는 데 할애했다. 가정과 일터에 지나치게 많은 중심을 두게 된 현대 사회에서는 제3의 장소라는 개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점점 더 합리화되고 모든 것이 관리되는 세상에서, 공적인 삶을 건져내려면 효과적인 논리와 언어가 필요하다”(9쪽)라고 보고 1부에서 제3의 장소에 대한 배경 이론을 단단하게 세우고자 했다.
2부에서는 비공식적인 모임이 이루어지는 제3의 장소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개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룬다. 독일계 미국인의 라거 비어 가든(5장)은 평화적 공존과 연대의 모델로, 메인 스트리트(6장)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비공식적 공공생활이 활기를 띠던 미국 소도시의 모습으로, 영국 펍(7장)은 누구나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가 되는 양상으로, 프랑스 카페(8장)는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생활양식을 지켜낸 사례로, 미국 태번(9장)은 음주시설이 갖는 독특한 잠재력을 보여주는 장소로, 클래식 커피하우스(10장)는 개방성과 수용성을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각각의 장소들은 제3의 장소의 모델로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할 뿐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특이점을 보여줌으로써 제3의 장소의 폭넓은 기능을 가늠하게 한다.
3부는 비공식적인 공공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쟁점을 다룬다. 비공식적 공공생활에 적대적인 도시의 거주환경은 무엇일까.(11장) 아이들이 어슬렁거리며 어울려 노는 길모퉁이 상점이 사라지고 대신 지역 외곽에 대형 쇼핑몰이 늘어섰다. 기존에 제3의 장소로 기능하던 장소를 프랜차이즈화하여 사람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과거에는 동네 무료 수영장이면서 회의실 역할도 하던 장소를 이제는 수강료를 낸 몇몇 주민들만 독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결과로 미국 중산층 거주민들이 여가 시간의 90퍼센트를 집 안에서 보내게 되었다. 제3의 장소와 성별 문제도 중요한 이슈다. (12장) 제3의 장소는 역사적으로 여자와 남자를 분리하는 편이었다. 여기에는 다소 남성 중심적인 면이 있지만 동성끼리의 만남이 주는 사회적 긴장 완화 기능도 분명했다. 한편 신생 주거단지에서 기동력이 부족하고 가족에게 구속되는 경향이 심한 주부, 공동체에서 고립된 부부의 문제도 성별 문제에서 함께 다룬다. 13장에서는 아이들을 조명한다. 제3의 장소의 쇠퇴와 노동 환경 변화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은 아동이다. 공동체를 상실한 사회에서 아이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 접할 기회를 잃는다. 그래서 부모에게 더 의존하며 부모는 아동의 삶을 ‘조직화’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린다. 어쩔 수 없이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우리는 아이들을 이 사회의 기득권에 기여할 소비자로서 키우게 되었다. 마지막 장에서는 우리가 ‘편리함’이나 ‘효율’이라고 생각했던 가치를 왜곡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물리적 환경이 횡포를 부림으로써 공동체를 상실한 현대인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처럼만 살라는 법은 없다!”(4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