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부정과 부패에 맞서는 첫걸음 ‘김영란법’을 탄생시킨
김영란 전 대법관의 법과 정의에 관한 상식의 철학
<법치주의와 정의를 돌아보다: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 보급판 출간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법관이자 ‘김영란법’의 주인공,
그가 사색한 법치주의와 정의의 집결체
“법치주의가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30년 가까이 판사로 일했지만 딱 부러지게 ‘이것’이라고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던 중 새삼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법은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을 담을지는 담는 사람 마음이라는 것 하나와, 담는 사람도 일단 그릇의 틀에 구애를 받게 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법이라는 그릇을 채우는 사람도 그 법에 구속된다는 것을 우리는 법치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릇을 채운 행위를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법이라는 그릇을 누가 어떤 내용물로 채웠는지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의 문제이므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근대법의 역사는 처음에는 통치자도 구애를 받는 법치주의를 세우는 데서 시작하여 점점 더 그 내용을 실질적 민주주의에 맞도록 채워 나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이런 근대법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 김영란
《법치주의와 정의를 돌아보다: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가 풀빛에서 출간되었다. 지난 2월 〈비행청소년〉 시리즈의 10번으로 출간된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 보급판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 많은 분들이 이 책은 청소년들도 읽어야 하겠지만 법에 관한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은 다양한 사람이 청소년 책이라는 선입견 없이 접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어서, 그들의 지지와 격려에 힘입어 일반인들을 위한 보급판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보급판 《법치주의와 정의를 돌아보다: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는 애초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에 담긴 내용은 그대로 두고, 판형과 디자인 면에서 손에 잡힐 수 있는 가벼운 느낌으로 새로 만들어졌다. 최근 계속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김영란법’의 원 취지 및 그것을 제안한 김영란 전 대법관의 법에 관한 철학이 궁금했던 독자라면 누구라도 이 책을 일독하고 그에 관한 자기 입장을 세울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법의 출발부터 성장, 과도기를 거쳐 지금에 이른 역사를 조망하다
2004년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여성 대법관에 임명되어 닮고 싶은 여성 전문가로 떠오르고,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추진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2015년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어 2016년 9월 시행을 앞두면서 단순히 여성 법조인을 넘어 정의의 대명사로서 자리 매김한 인물. 김영란은 대법관 재직 시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여 ‘소수자의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진보적 판결을 주로 내리는 ‘독수리 5형제’의 하나로 칭해지기도 했다. 그런 그가 2년 동안 청소년을 위해 준비해 엮은 법 교양서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를 출간하고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청소년 책이라는 선입견 없이 다양한 사람이 이 책을 법치주의와 정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책으로 접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힘입어 보급판 《법치주의와 정의를 돌아보다: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를 펴냈다. 열린 법이란 무엇이고, 법치주의와 정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먼저 그는 법의 기원부터 살핀다. 대체 왜 법이란 것이 만들어졌고, 무슨 필요가 있었는지. 그가 끌어들인 것은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의 종자 산초 판사다. 산초 판사가 상대방이 자신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았다고 주장한 노인과 자신은 분명 돈을 갚았다고 맹세하는 또 다른 노인의 채무 관계를 법조문이 아닌 상식에 따라 시원하게 해결하는 장면을 예로 들면서, 결국 법은 사람들의 상식에 기대어 만들어져야 하고 사람들이 억울함을 느끼거나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해소하고 해결하는 제3의 공정한 잣대로서 등장한 것이 법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법이 태초에 등장하게 된 배경을 말한 뒤 법이 발전하게 되는 역사적 경로를 차근히 밟아 나간다. 왕이 곧 법이었던 절대왕권 시절을 거쳐 왕도 법에 따라야 하고 시민의 권리를 법으로서 보호해야 한다는 근대법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근대법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설 이론과 함께 정리한다. 그리고 법이 주권자인 국민의 권리를 지켜 내기 위해 법치주의의 제도로 정착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핀다. 그 과정을 살피기 위해 정의관 및 헌법정신을 자연스럽게 끌어내 설명한다.
사람들의 상식을 반영하는 정의로운 법에 대한 요구는 어느 때나 동일하지만, 각 사회마다 생각하는 정의의 관념은 다르기에 상이한 정의관을 비교 분석하며, 정의와 연관시켜 각 나라의 최고법인 헌법정신이 담고 있는 기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법치주의라는 이념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어 구조화되는지에 관해서도 차근차근 정리해 준다. 사법부의 독립 및 상소제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준 및 방식에 대한 구체적 설명들이 차례로 나온다.
문화와 역사, 철학에 대한 풍부한 식견으로 요리한 감칠맛 나는 법 한 그릇
법의 기원부터 변화의 과정, 현재 제기되는 법에 관한 다양한 해석 및 논쟁은 물론이거니와 법의 필요성 및 법이 유지되는 기틀인 정의라는 관념, 법치주의의 구체적 실현 제도 등 법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그 차례만 보면 버겁고 딱딱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어렵고 방대한 주제를 말캉하고 부드럽게, 또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만큼 감칠맛 나게 요리하는 데서 김영란의 저자로서의 숨겨진 미덕이 돋보인다.
법의 기원과 필요성은 《돈키호테》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미셸 투르니에 작)의 한 장면이 그 어떤 설명보다 명쾌히 대변하고, 법이 사라진 세상과 법이 정의롭지 않을 때의 상황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 실감 나게 재현한다. 헌법정신은 영화 〈아바타〉와 미국 사법사상 중요한 판결로 기록되는 ‘아미스타드호 사건’ 및 ‘드레드 스콧 사건’이 서로 엮여 하나의 그물처럼 펼쳐진다. 다양한 정의관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언급되어 널리 알려진 ‘통제 불가능한 전차’ 문제를 시작으로,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주인공이 정의관의 한 단면을 우리 앞에 정확히 내민다. 홉스-로크-루소라는 사회계약론의 삼인방이 등장하고, 로빈 후드가 리처드 사자심왕 및 존 왕과 함께 등장해서 영국의 대헌장을 꺼내 놓는다. 춘향이가 공법과 사법의 관계를 설명하고, 미하엘 콜하스가 상소제도를 강의한다.
김영란은 지금까지 틈나는 대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섭렵한 방대한 독서 지식과 문화적 소양을 마치 비장의 카드처럼 이 책에서 꺼내 보인다. 중요하다고는 생각해도 전문적이고 어렵기 때문에 내가 알 바 아니고 알 수도 없는 것이 법이라는 일반인들의 편견을 깨고 싶은 욕심이다. 법조항이 어려울 뿐 법이 가진 상식과 철학은 우리 일반인의 상식이고, 법이 존재하는 것은 국민을 위해서이며, 국회가 하는 일은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드는 일이다. 법은 우리 생활 그 자체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에도 우리의 법에 대한 인식은 그것과 무관할 거라 주문을 건다. 원칙은 단순하고, 원리는 간명하다. 우리가 법의 주인이다.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김영란은 법과 무관할 것만 같은 소설과 영화들 속에 법의 원리가 있고 법의 이면이 있음을 증명한다. 아주 쉽고도 재미있게 말이다.
법을 아는 것은 민주주의를 만들고 진정한 주인으로 살기 위한 것
이 책은 시간적으로는 함무라비법전부터 대헌장을 거쳐 근대와 현대에 이르고,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을 두루 돌고 우리나라에 당도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법이 그때그때의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고 변주되는 모습, 그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정의와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들이 달라지고 공고해지는 과정들을 조망한다. 그 흐름을 지금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법의 필요성이 강화되는 만큼 법치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형성되어 온 제도적 장치들이 그 장치들의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제도의 원래 취지를 잃어버릴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고 이 책은 경고한다.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가 될 소지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나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책은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라고 말한다. 법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일치되는 민주주의의 발전, 민주주의를 좀 더 잘 방어하는 데 필요한 기본권의 헌법상 보호 등과 함께 발전하여 왔다는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도적 장치들과 그 장치들의 운용도 이런 역사의 발전 방향과 일치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경직된 제도로서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거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장치들은 시민들의 참여와 토론의 장에서 늘 점검되어야 하며, 그것이 열린 민주주의라고 단언한다. 선거제도나 공무원 제도의 개선, 경제민주화나 청년 수당 도입 등 국회에서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장치들이 유효한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논의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국회의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국가의 주인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지금의 사회적 논의와 제도에 관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열띠게 토론하는 적극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법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정의는 불변의 관념이다 등의 생각들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한때는 신이 정한 법이, 또 한때는 절대왕권이 정한 법이, 또 다른 한때는 자연법이 사람들이 사는 사회와는 별개의 이상적인 규율체계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은 더는 사람들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온 어떤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법이 자신들의 생각을 제대로 반영해 주지 못한다면 결코 그 법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마지못해 지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법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법이 상식이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법은 그 시대의 상식을 반영하여 늘 변하며, 변해야 한다. 우리에게 맞는 그 법을 어떻게 찾아 나갈 것인가.
이 책은 무엇이 정의인지, 어떤 법치주의가 합당한지, 우리 현대사회에 필요한 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답을 열어 두고 있다.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진지한 성찰과 열정적인 토론 끝에 합의된 결론이라는 원칙만을 남겨 둔 채. 법은 결코 입법기관과 사법기관의 전유물이 아니다. 법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를 심화시켜 진정한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법을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으로서 법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알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열린 법’의 핵심이다. 《법치주의와 정의를 돌아보다: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가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디딤돌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