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빛의 ‘청소년 철학창고’ 서른일곱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이번 책은 철학사에서 중요한 장면인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둘러싼 논쟁과 재판의 생생한 현장,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순차적이고도 명약관화하게 밝힐 수 있도록, 플라톤의 대화편에 실린 두 작품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을 한 권에 담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재판에 서게 된 소크라테스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자신에 대해 쌓인 당시의 선입견에 대한 변론과 고발 내용 그 자체에 대한 변론, 유죄 판결을 받고서 자신의 형량을 제안하는 내용, 사형 선고를 받고서 배심원 및 모두에게 남긴 최후의 진술을 재판장에서 지켜본 제자 플라톤이 정리한 내용이다. 짧은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소크라테스가 70년 동안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왔는지, 그런 소크라테스를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판단하고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 즉 소크라테스가 무엇에 가치를 두었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일관되게 가진 태도는 무엇이었으며, 그런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자세히 드러나 있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의 전 생애에 대한 이야기와 그것에 대한 변론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그렇다면 《크리톤》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기에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짝을 이룰까? 소크라테스는 일흔의 나이에 고발을 당해 500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전 생애에 대한 변론을 세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해내야 했다. 결국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형벌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선고받은 사형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배심원들의 동정을 사지 못한 자신의 변론 태도를 탓했을까? 고발자들이 원래 원하던 추방형을 제안하지 않은 걸 후회하며 지금이라도 탈옥을 해서 다른 나라로 도망칠 궁리를 했을까?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끔찍하고 조바심 나며 괴로운 시간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진짜 마음이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을 하는 작품이 바로 《크리톤》이다. 크리톤은 어렸을 때부터 소크라테스와 한동네에 살며 소크라테스를 따르고 언제든 그를 도왔던 죽마고우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하고 재판의 결과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과정을 몹시도 고통스럽게 지켜봤던 그는, 소크라테스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감옥에 찾아와 이제라도 탈옥을 해서 생을 더 지속해야 한다고 친구를 설득한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죽음 앞에 평온했던 소크라테스는 예의 대화법을 이용해 탈옥이 왜 올바른 선택이 아닌지,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할 삶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차분하게 설명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자신의 전 생애에 대한 변론이라면, 《크리톤》은 죽음 앞에서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원칙에 대한 변론이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된다. 다수의 횡포, 특히 여론이나 물리적인 힘에 의한 횡포에 소크라테스는 결코 굴하지 않았고,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어떤 순간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가 강조한 대화, 토론을 통한 열린 지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교훈으로 빛난다.
2500년이 지난 지금 ‘청소년 철학창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 죽음 앞에 의연했던 외로운 철학자의 최후 진술》로 다시 태어난 두 작품은 단절 없이 죽 이어진 원문의 형태를 과감히 순서와 내용에 따라 나누고, 개괄 설명과 보충 설명을 원문 앞뒤로 달아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며 읽을 수 있도록 도왔다. 고어에 얽매이지 않고 현대적인 우리말로 원문을 쉽게 옮겼으며, 청소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친절한 해설은 이 한 권으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알 수 있게 돕는다. 특히 의견이 다른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안타까운 지금의 시대에 이 책은 토론을 통한 열린 지성의 가능성을 열게 하는 열쇠로서 더없이 반갑다.
* 소크라테스, 진리를 위해 순교하다
기원전 39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 아고라 광장 옆에 있는 법정이 아침부터 시끌시끌하다. 사람들이 법정으로 떼를 지어 몰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테네의 기인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는 날이다. 많은 배심원과 방청인들 사이에서 키 작고 못생긴 늙은이 소크라테스가 외롭게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그를 고발한 사람들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인 멜레토스와 당대 유명한 정치인인 아니토스와 리콘이다.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기소된 소크라테스는 결국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는다. 아무런 공적인 지위도 힘도 없는 일흔 살 노인을 왜 굳이 사형을 시키면서까지 없애려 했을까? 거기에는 당시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아테네의 전성기였던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는 모든 그리스 국가들의 학교였다. 아테네는 문화와 정치 모두에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모든 국가의 모델이자 이상이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후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과거 지중해 동부의 에게해를 호령하던 아테네는 더 이상 막강한 함대를 지닌 위대한 제국이 아니었다. 경제는 피폐할 대로 피폐했고 시민들은 조국인 아테네를 떠나 다른 도시 국가로 도망갔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귀족주의 세력이 잠시 힘을 얻었으나 민주정파는 다시 세력을 회복해 정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다시 아테네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활약했던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이나 민주정에 참여한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수구적인 귀족 정치를 옹호하는 듯한 말을 일삼고 다녔다. 이와 더불어 그는 국가나 공동체의 질서보다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을 강조했다. 더구나 그의 독특한 캐물음 방식의 질문을 통해 당시의 유명인들, 특히 정치인이나 지식인층을 망신 주고 다녔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 주류 사회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정파 측은 그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고자 한다. 당시 주류 세력이었던 민주정파와 대립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몰고 다니는 기인 소크라테스를 제거한다면 민주정파는 그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현실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지인들인 크리티아스, 알키비아데스 등은 당시 주류 정치 세력과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개인주의적 입장은 귀족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쳤으므로 민주정파로서는 소크라테스를 자신들의 반대 세력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 기원전 5세기 무렵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적 인물들은 도시 국가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준 것은 소피스트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궤변을 일삼았다. 그러니 아테네처럼 개방적인 도시에서조차 그들은 배척받고 있었다. 결국 민주정파의 질시와 미움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일흔의 나이에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 외로운 선각자가 죽음 앞에서 외치는 올바름에 대한 신념
많은 이가 이름을 기억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하지만 소크라테스만큼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흔치 않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아, 우리가 그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사상은 거의 모두 그에 관해 쓴 글을 통해서이다. 대표적으로 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사상을 여러 개의 작품으로 자신의 대화편에 담았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이하 《변론》)과 《크리톤》 등이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게 하는 대표적 작품이다.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은 주로 개인 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변론》은 법정이라는 장소에서 500여 명의 배심원들과 다수의 방청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변론을 담고 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존경하는 제자의 마음이 앞서 스승을 훌륭하게 기술하고 싶었다 하여도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사실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재판을 사실 그대로 적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변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기소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고 먼저 자신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과 오해에 대해 해명하는 부분이다. 이어서 실제 재판에서 자신을 기소한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의 고발에 대해 변론한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과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반론을 편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소명이 철학하는 일이라 밝히며, 동정을 구하지 않고 당당히 배심원들과 신께 판결을 맡긴다는 말을 남긴다. 둘째,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로부터 220 대 280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 자신에게 적절한 것은 영빈관에서 받는 식사 대접이라고 말하며, 벌금 30므나를 제안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사형 선고가 내려진 이후 자신에게 사형표를 던진 사람들과 벌금형에 투표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말을 각각 남긴다. 그리고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아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소크라테스가 처형되기 전, 소크라테스에게 헌신적이었던 친구 크리톤이 감옥으로 찾아와 여러 이유를 들어 탈옥하라고 설득하는 내용이 《크리톤》이다. 《크리톤》에는 방임에 가까운 자유와 중우 정치로 전락한 민주주의의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사랑한 아테네의 시민 공동체 및 법률과 관련해서 그가 지키려 했던 원칙과 신념들이 담겨 있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이 제안한, 감옥과 사형 집행으로부터의 도피는 악할 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절차에 불복종하는 행위로 국가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크리톤》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여러 이유를 들어 크리톤이 친구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둘째, 친구의 탈옥 제안에 소크라테스가 답하는 부분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두려워 평생 지니고 있던 삶의 원칙을 내팽개쳐서는 안 되며 잘 사는 것보다 ‘훌륭하게’ 사는 것을 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탈옥은 시민들 사이에 합의한 사항을 지키지 않는 올바르지 않은 짓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법률과 시민 공동체와 가상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조국과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조국에 살 것을 맹세했다면 조국의 법에 따라야 하며, 다른 지역으로 도망쳐서 사는 삶은 모두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완고함 앞에서 크리톤은 체념하고 만다.
*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것
《변론》과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초월해서 자신의 철학적 신조를 지키며 살아간 도덕적 실천가였다. 두 작품을 통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 윤리설을 비판하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절대주의 윤리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은 보편적 이상을 지니고 있어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윤리나 진리, 도덕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세속적인 욕망이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 소크라테스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일방적인 독백이나 깊은 사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방과의 거리낌 없는 대화, 어떤 주제에 대해서나 격의 없이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가 토론을 중하게 여긴 이유는 단순히 상대방의 무식이나 현명하지 못함을 폭로하는 데 있지 않다. 토론을 통해 무지를 자각하고 참된 앎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된 앎을 통해 인간이 지녀야 할 고귀한 덕을 밝히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그가 생각한 진정 참된 삶이기 때문이다.
셋째, 소크라테스는 성찰하는 시민성, 비판하는 시민성을 이상적 시민성이라 보았다. 자기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살아가는 정신이 성찰하는 시민성이며, 공적 권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사유와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의문을 제기하는 정신이 비판적 시민성이다.
넷째, 대중을 일깨우는 등에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아테네라는 거대한 말, 스스로 잘났다는 자만심과 매너리즘에 빠져 스스로가 지닌 오류를 모른 채 안주하는 시민 집단, 사리 분별을 못하는 무지몽매한 대중을 일깨우는 지식인으로서 스스로를 묘사하며, 그것이 신이 자신에게 내린 소명이라 여겼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영혼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옳지 못한 행동이나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죽음을 포함해서 그 어떠한 것도 도덕적 수치심보다 더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선하게 살고 얼마나 의롭게 죽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의에 불의로 맞서지 않고,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그에 걸맞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결국 온당치 않은 사형이라는 결정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는 자신이 탈옥함으로써 조국의 법과 민주주의 체제에 해를 가하기보다, 즉 불의에 대해 불의로 대항하기보다 스스로 불의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 그것이 옳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모든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모두가 누리는 표현의 자유 때문에 그는 죽임을 당했다. 그만의 ‘철학함’을 포기하라는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비극적 죽음이 오늘날 그의 철학을 더 찬연히 빛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얼어붙은 사고와 싸우는 훌륭한 투사로 묘사된 소크라테스는 모든 것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열려 있는 사고로 모든 것에 대해 묻고 또 물음으로써 진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대화, 토론을 통한 열린 지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교훈으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