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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 영화와 광고로 본 문화의 두 얼굴 크게보기

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 영화와 광고로 본 문화의 두 얼굴

저자

김선희

발행일

2011-05-25

면수

153*212

ISBN

252쪽

가격

9788974744519

가격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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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력한 권력의 화신 ‘대중문화’에 쉽게 휩쓸려 가지 않는
‘섬세한 눈’이 필요한 그대를 위한 책!
이 책은 일상적으로 뇌에 잔상을 남기는 강력한 권력의 화신, ‘대중문화’에 쉽게 휩쓸려 가지 않으려는 소박한 저항의 시도들을 담은 결과물이다. 소박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런 식의 시도가 강력한 전복이 될 수도, 집단적 문제 제기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영화와 드라마, 광고를 소재로 그 이면에 드러난 우리 사회,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끌어내 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판단할지 두더지처럼 더듬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두더지는 지독한 근시라고 한다. 그래서 이미 나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어리석을 정도로 눈앞에 흙만을 우직하게 더듬고 파낸다. 물론 그 과정에는 시행착오와 실패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행착오가 두려워 나름의 고민과 판단 없이, 이미 땅속에 나 있는 길처럼 남이 만들어 놓은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면 과연 스스로의 눈으로 다양한 것들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에게 대중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부를 놓치지 않고 차이를 버리지 않는 섬세한 눈이 필요하다고 끊임없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니 이 책은 비판의 원리나 방법이 필요한 사람보다는 ‘이런 식으로 비딱하게 보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일종의 모의 주행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멋대로 대중문화 바라보기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 <인디애나 존스>에서 <해리 포터>까지 2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대중문화 제멋대로 후벼 파기!
이 책은 크게 4개의 주제인 ‘복제되는 현대 신화들’, ‘문화 거울로 자기 바라보기’, ‘공존을 위한 숙제들’, ‘지구 단위로 생각하기’를 가지고 영화와 광고, 드라마 등 총 20여 편을 샅샅이 해부하여 분석해 놓고 있다.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여기서 소개된 영화 속 세상들을 바라봐 왔으며, 그렇게 바라보게 된 ‘보이지 않는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 투영된 삶의 문제들을 개인과 사회 그리고 지구 단위의 입장에서 어떻게 고민하고 판단해야 할지 그 경로의 길을 몇 편의 영화와 함께 따라가 보기로 하자.

정보 사회에서 어떻게 욕망이 왜곡되어
개인에 대한 감시와 관음을 정당화시키는지를 보여 주는 영화…‘트루먼 쇼’

어려서부터 트루먼은 오직 그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트와 배경들, 그를 위해 짜여진 각본 속 사람들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성장해 왔다. 모든 장면은 24시간 생중계되었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트루먼이 아기일 때부터 일거수일투족에 박수를 치고 울고 웃으며 그의 성장을 지켜봐 왔다는 것을 그 자신만 몰랐던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후 과연 트루먼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중략) 영화 속에서 트루먼과 일면식도 없는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행동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진심어린 응원자처럼 등장한다. 트루먼이 마지막에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도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사람들은 트루먼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환호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트루먼에게는 가해자일 뿐이다. 그들 역시 감시자로서 트루먼 자신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사생활을 오로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기만하고 오락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개인이 부도덕한 게 아니다. 그들이 죄의식 없이 트루먼의 인생을 구경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런 식의 감시가 문화적으로 허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시도한 음지의 감시가 아니라 누구나에게 허용된 문화적, 대중적 오락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본문26, 28~29쪽 발췌


신분 상승의 판타지가 어떻게 사람들을 마취시키고
한탕주의에 빠지게 하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드라마…‘꽃보다 남자’

사람들로 하여금 드라마와 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하게 하는 것은 화려한 상류층의 생활 자체가 아니라 드라마의 다른 축인 서민적 생활과의 ‘거리’다. 상류층 주인공의 반대편에는 생계형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서민 주인공이 있다. 두 주인공의 삶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이 채워질 수 없을 듯한 간극은 보는 사람에게 두 가지의 쾌감을 약속한다. 하나는 서민 주인공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이 겪는 고난과 시련에 사람들은 공감하고 안타까워한다. 두 번째 쾌감은 이 극적 대비가 결국 극적 상승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다. 주인공이 재벌과 맺어짐으로써 한번에 모든 불운과 시련을 떨쳐버릴 뿐 아니라 평생 같은 고생을 반복하지 않아도 될 부에 도달했다는 안도와 부러움이 드라마를 보게 하는 힘이 된다. 부자의 세계를 엿보고 경험하고 싶은 관음적 욕구와 신분 상승에의 판타지가 이 드라마가 내세우는 상품성이다. >> 본문 50~51쪽 발췌

현대 사회에서 한 개인의 성장이 갖는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영화…‘해리 포터’

《해리 포터》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정의와 선의 투쟁이다. 해리 포터가 신념을 잃지 않고 자신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이 분명히 선의 편에 있고 그와 싸우는 대상이 분명히 악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해관계와 권력관계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는 분명한 절대 악보다는 현실주의적인 필요악들이 더 많다. 그리고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추상적인 명분으로서의 선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물론 알 카에다의 9.11 테러 자체는 분명히 악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복수라는 명분이 있다 해도 결과적으로 무고한 생명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9.11 테러의 배후에는 이슬람 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고 세계를 상대로 미사일 방어 전략을 세워 전 방위적으로 압박해 가던 부시 정부의 대외 정책이 존재한다. 또한 더 이상의 테러를 막겠다며 자행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선제공격에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 문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과연 누가 진정한 악이고 누가 진정한 선인가? >> 본문 77?79쪽 발췌


한국 사회가 어떻게 가족을 정상과 보편으로 만들어
그 밖의 사람들을 소외시키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영화…‘길버트 그레이프’

현재 영어에도 아들(son)이라는 말로 남아 있듯 손은 누구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성이 따로 없었던 시대에 유럽에서는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누구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잭슨(Jackson) 같은 성도 잭의 아들(Jack\'s son)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서만 자신이 누군지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그 권위하에 가족들이 위계 지워지는 것은 동양의 풍경만은 아니었다.
영화의 주인공 길버트와 베키의 삶이 불균형하고 위태로울 뿐 아니라 낯설어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모두 ‘아버지’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고 증명할 수 없게 된 무적자들인 셈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가족’이라는 항목에는 아침에 식탁에 모여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아빠, 엄마, 아이들의 그림이 들어 있다. (중략) 서른이 넘어도 독립하지 않는 자식, 자식의 교육이나 결혼에 관여하는 정도를 지나 아예 목숨을 건 듯 필사적으로 억지를 부리거나 강요하는 부모, 오로지 미래의 성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서 자발적으로 해체된 기러기 가족 등등, 우리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른바 ‘가족’의 풍경이 다른 문화에서는 지극히 낯설고 또는 위험스러운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믿고 있는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관념이 허구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 본문 104?105?110쪽 발췌

오리엔탈리즘적 영화를 통해 우리가 우리 사회 안의 타자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배제하는지를 보여 주는 영화…‘인디애나 존스’

비서구인에게 원시성과 야만성을 덧칠하는 것은 헐리우드의 오랜 전통이다. 원숭이의 뇌를 먹거나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빼는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에 비친 동양의 이미지는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전통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 브랜든 프레이저가 주연을 맡은 <미이라>(The Mummy, 1999) 시리즈 등 비슷한 어드벤처 장르 영화들도 이집트, 중국 등 장소를 달리하며 자기들이 상상하는 동양 이미지를 낯설고 미개하고 잔인하게 형상화해 왔다. (중략) 우리 사회에서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의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이미 상당수의 이주 노동자가 함께 살아가는 다국적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주 노동자로 부르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우리 눈에 이주 노동자는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인들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동양인이거나 피부가 검은 사람들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는 차별적 표현이다. 영어 학원의 원어민 강사를 이주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 준다. >> 본문 160??169쪽 발췌


대중문화에서 중계되는 전쟁이, 힘의 논리를 어떻게
정당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은폐하는지를 보여 주는 영화…‘블랙호크 다운’

소말리아 내전에서 작전 수행 중이던 미군이 겪은 지옥 같은 하루를 다룬 영화 <블랙호크 다운>(Black Hawk Down, 2001)은 끝없이 반복되는 총성을 통해 관객을 시가전 한가운데로 인도한다. (중략) 영화 속에서 수없이 많은 소말리아 반군 역시 총에 맞아 죽어가지만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들은 총소리와 함께 쓰러질 뿐이다. 미군들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가지만 소말리아 반군의 ‘피’는 화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중략) 비슷한 장면은 반복된다. 적의 로켓포 공격으로 하반신을 거의 잃고 죽어가면서 한 병사가 상관의 팔에 안겨 말한다. ‘딸들에게 괜찮다고 전해 줘요.’ 그 순간 관객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그 비극성에 처참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그들이 쏜 소말리아 반군 역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며,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미군들이 ‘피’를 흘리며 안타깝게 죽어가는 동안, 이들과 마찬가지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며,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였을 ‘적’은 인간성을 박탈당한 채 전쟁 기계로 그려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여기, 이 지점이 우리가 누구의 눈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지 반성이 필요한 곳이다.
>> 본문 232??242??243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