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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랑, 산유화로 지다 크게보기

향랑, 산유화로 지다

저자

정창권

발행일

2004-05-27

면수

신국판

ISBN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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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474-899-1 0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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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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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가족사를 보는 의의
‘가족’은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 가족 또한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기 때문인데, 호주제 폐지 논쟁이나 이혼과 재혼의 증가 등이 그 변화의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이혼과 재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편부모 가정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가족에 대한 이런 식의 편견이 형성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가족사’이다. 특히 17세기는 한국 가족사에 있어 커다란 변혁기로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그러나 전통 시대 가족사는 자료 부족을 이유로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근현대 가족사에 관한 연구 저서도 거의 없다. 특히 가족사를 갈등적 측면에서 고찰한 연구서는 더더욱 없으며,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한 책은 전무한 상황이다. 이제는 우리의 전통 가족사를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향랑 사건을 통해 가족사를 갈등적 측면에서 새롭게 고찰하고자 하였다.

향랑, 그녀는 누구인가?
향랑은 17세기 후반을 살다가 18세기로 접어든 숙종 28년(1702)에 자결한 여인이다. 18세기 여러 문인들은 전형적인 열녀담의 형식으로 향랑의 자결을 형상화했는데, 이로 인해 향랑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열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향랑은 여느 양반 계층의 열녀들처럼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여인이 아니었다. 또한 다소곳하고 얌전하게 자신을 죽이고 살았던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던 서민층의 평범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렇듯 평범한 여인이었던 향랑이 왜 자결을 하게 되었을까?
향랑은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임천순의 아들 칠봉과 혼인을 했는데, 칠봉은 향랑을 미워하여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그 폭력을 견디다 못한 향랑은 칠봉과 갈라서고 친정으로 돌아오지만 친정 부모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숙부 집에 몸의 의탁하나, 숙부가 개가하기를 요구하자 향랑은 이를 거부하고 다시 시댁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시아버지 또한 그녀에게 개가를 권유하며 받아주지 않는다. 개가를 원치 않았던 향랑은 자결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녀의 자결은 자신의 의지가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노래 <산유화>에 담긴 뜻은?
<산유화>는 백제시대 부여 지방의 민요로, 백제 망국의 한을 담은 노래였다.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산유화는 전래되면서 그 슬프고 처량한 음조에 조금씩 다른 가사를 얹어 불렀다고 하는데, 향랑 또한 이 음조에 자신의 오갈 데 없는 비극적 처지를 담아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향랑의 <산유화>는 자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한 맺힌 인생사를 상징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이야기로 풀어보는 미시사, 가족사
이 책의 저자 정창권은 이전의 저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적 글쓰기’를 시도한 바 있다. 이번 책 또한 이와 같은 글쓰기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저자가 이러한 글쓰기를 행하는 이유는 ‘스토리, 곧 이야기는 복잡한 현상을 간단하고 즐거운 방법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직접적이고 논리적인 글에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전체 내용을 이야기체로 전개하면서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설명체로 전달하는 ‘픽션-논픽션-픽션’의 형태에 액자구조를 취하여, 향랑 사건의 첫 기록자인 조구상을 통해 이 사건을 시작하고 끝맺도록 구성하였다.

주목할 만한 내용
*왜 17세기 가족사인가?
17세기는 한국 가족사에서 커다란 변혁기였다. 실제로 16세기인 조선 중기에는 장가와 처가살이 혹은 남귀여가가 보편적이어서, 가족관계에 있어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았고, 친족관계에서 외손과 본손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재산도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상속받았고, 조상의 제사도 서로 돌려가며 지내는 윤회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가족제도가 부계 적장자 위주로 변하였고, 친족제도도 모계와 처계를 배제한 부계만으로 한정되었다. 혼인제도 역시 친영과 시집살이로 바뀌었으며, 재산상속도 점차 아들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향랑의 자살 사건은 바로 이러한 17세기 가족사의 변화, 곧 완고한 가부장제의 정착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은 17세기 중반의 장화, 홍련 살해 사건과 함께 조선 후기에 발생한 매우 충격적인 가족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에는 계모 문제나 가정폭력, 이혼, 재혼 등 가족 내의 갈등적 측면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에서 향랑의 일생을 쫓아가면서 당시 가족사와 서민 가정의 생활문화를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계모는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향랑 사건을 기록한 문인들은 한결같이 향랑의 계모를 여타 조선 후기 계모형 고소설에 등장하는 계모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향랑의 계모는 조선 후기 완고한 가부장제의 또다른 희생자에 불과한데, 고려시대나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계모의 지위가 보장되었을 뿐 아니라 적자와 의자 사이에 법제적으로 차등을 둔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혈연주의의 강화, 여성의 지위 하락, 가부장적인 지식인들의 왜곡된 발언 등으로 계모는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향랑의 계모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악인으로 묘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사실 일반적인 당시의 어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문인들은 향랑을 열녀로 확실히 부각시키기 위해 계모를 악인으로 몰아붙여야 했던 것이다.

*부부싸움 - 외도 - 가정폭력의 상관관계
옛날 사람들도 과연 부부싸움을 했을까? 만약 했다면 주로 무엇 때문에 싸웠을까? 가장 일상적으로 부부가 싸움을 한 것은 남편이 살림이나 자녀교육 같은 가사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심한 부부싸움을 벌인 경우는 역시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는데, 조선 전기 <묵재일기>를 쓴 이문건의 경우 기녀를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부인과 크게 싸움을 벌여, 부인의 말에 따라 기녀를 멀리하게 된다. 또한 중종 때 있었던 ‘이형간 사건’이나 ‘홍언필 사건’, ‘신수린 사건’ 등은 남편이 외도를 하여 부인과 크게 싸우고 쫓겨난 사건들이다. 이와 같이 조선 전?중기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남편이 외도를 하면 그저 바라보며 체념하지 않았으며, 이들의 싸움 또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반적으로 남편의 아내구타인 ‘가정폭력’ 또한 외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조선 중기까지는 남편이 외도를 하면서 아내에게 폭력까지 행사한 예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아내의 남편구타, 다시 말해서 ‘매맞는 남자들’이 문제될 정도였는데, <태평한화골계전>에 실린 조관 허모의 경우나 <천예록>의 ‘아내에게 종아리를 맞은 성하길’, ‘아내에게 수염을 잘린 우상중’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인 조선 후기에 이르자 남성 위주의 완고한 가부장제가 정착하면서 가부장적 가정폭력, 곧 ‘남편의 아내구타’가 본격적으로 문제시되기 시작한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가정폭력의 사례는 <이춘풍전>이나 <봉산탈춤>에 잘 나타나 있으며, 향랑의 남편 칠봉의 아내구타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칠봉은 이 책에서 ‘삼월이’로 설정된 여자와의 외도 때문에 향랑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언제부터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백안시되었을까
고려시대만 해도 남녀간의 이합이 비교적 자유로워, 성종비나 충숙왕비와 같이 이혼한 여인이 국왕의 배필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이혼이나 재혼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니어서 남편의 출세길이 늦어지자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한 여성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유독 여성의 이혼과 재혼을 죄악시하는 풍토가 생기는데, 이 시기엔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여자는 무조건 출가해서 시집의 대(代)를 이을 자식(아들)을 낳아 며느리로서 할 도리를 다해야지, 그렇지 않고 중간에 혼인을 파하고 돌아오면 그 자신은 물론 친정 부모와 조상까지 욕을 먹인다고 여겼다. 또한 성종은 이른바 ‘재가금지법’을 제정하여 여성의 재혼을 규제하기 시작했으며, 열녀 표창, 곧 재혼하지 않은 여자를 표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수절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이혼과 재혼을 부정시?금기시하는 인식이 크게 확산되었고,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여성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저마다 수절하거나, 심지어 남편에게 절의를 지켜 자살까지 감행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즉,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힘들어지고, 백안시하는 풍토가 형성된 것은 사실 가부장제가 정착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였던 것이다.

*열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열녀’는 언제부터 존재한 것일까. 고려시대나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성의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절개(정절)를 지키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7세기를 기점으로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여성들은 ‘일부종사’를 강요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열녀 또한 이러한 조선 후기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즉 조선 후기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열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향랑도 남편과 갈라선 뒤 ‘개가를 거부’하고 ‘자결’했다는 그 결과만으로 조구상을 비롯한 당시 문인들에 의해 열녀(烈女)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녀는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향랑에게 개가란 칠봉과의 불행했던 혼인 생활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조선 후기의 가부장적 분위기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향랑은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자결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향랑의 예로 볼 때, 열녀담에 대해서도 한번쯤 발상을 전화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열녀라고 하면 무조건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여인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지만, 그녀들 또한 실제로는 여느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억척스럽게 현실을 살아낸 여성들이었다. 또한 향랑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양반들이 개인적인 치적을 위해, 혹은 가부장제를 강화하기 위해 열녀로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측면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암흑기에도 여성사는 살아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여성들의 자유로운 활동상이 나름대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여성예술가가 계속해서 출현하기도 했던, 상대적으로 열린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여성들은 오직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가문보조자로서의 역할만을 요구받았다. 안동 김씨가 대표적인 예인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이해력도 탁월했지만, 오진주와 혼인한 뒤로는 손에서 책을 놓아야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에 그러한 처지의 여성들이 소설을 중심으로 활발한 문예활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소현성록>, <옥원재합기연> 연작, <완월회맹연> 등의 ‘국문장편소설’이 그 예이다.
그리고 전 사회계층에 남존여비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향랑과 같은 서민층 여성도 많은 희생을 당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을 자기주장이라고는 전혀 내세우지 못했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여인이라고만 평가해선 안된다. 서민층 여성들은 향랑과 같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 자신들도 분명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임을 명백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