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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크게보기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저자

신복룡

발행일

2002-01-30

면수

신국판

ISBN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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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474-874-6 0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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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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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새로 보기』의 저자인 신복룡 교수의 신작!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는 백년 전 이 땅을 찾아온 서구인들의 시각을 통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되짚어보고, 그들의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 자신의 빛 바랜 자화상을 되돌아봄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풍운의 한말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비분강개하고 애상(pathos)에 젖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로는 그것이 오래라면 오래라고 말할 수 있는 10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비극은 이 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그때의 비극이 운명적이거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수가 저지른 재앙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의 비극은 기회 상실이었고 그것은 지배 계급의 미망迷妄 때문이었다.
새 천년이 시작되었다고 모두가 법석이지만 어제 뜬 해와 오늘 뜬 해가 무엇이 다른가? 유구한 역사 속에 수유須庾와 같은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즉 역사 앞에 겸허히 서서 온 길을 돌아보고 갈 길을 고뇌하는 길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디로 가려는지를 알고 싶거든 지나온 길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子曰 告諸往 而知來者: 論語 學而篇)

한국에서 활약한 많은 선교사들의 눈에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가난과 불결이었고, 더욱 절망적으로 본 것은 상류 사회의 사치와 방탕이었다. 어느 토호의 집 주인 마님은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고, 남편은 스코틀랜드 위스키와 프랑스의 샴페인과 꼬냑을 두루 갖춘 채 영국제 시거를 물고 있었으며, 집안은 수단제 카페트를 깔고 벽에는 프랑스제 시계와 독일제 거울이 걸려 있고 탁자는 미국에서 수입한 것 등 그 시대 얘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런 상류 사회의 사치와 방탕을 본 이방인들은 한국의 장래에 더욱 절망을 느끼게 된다.
또 하나 충격적인 것은 끔찍한 아동 학대였다. 한국의 아동생활에 많은 관심을 보인 와그너의 관찰에 의하면 한국의 아동 학대는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모의 주벽(酒癖)이나 후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위생적 양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비과학적인 사회적 편견에서 온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구인으로서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들 선호에 따른 여아의 학대였다. 한국에서 태어난 딸은 시집갈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하며 인간적인 대화를 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와그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차별은 특히 양가집에서 심했기 때문에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은 방,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던 하층 계급의 삶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는 것이다. 여아에 대한 차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 이름은 대체로 천하게 지으며,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시 한다는 것이다.
와그너의 근원적 분석에 따르면 그것은 한 가정에서 인격신으로서의 아버지라고 하는 절대 군주에 가려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머니란 아이를 낳는 생산 도구와 일정량의 노동을 제공하는 가사노동자에 불과할 뿐, 한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이 망실되었을 때부터 그의 소생 또한 아버지의 위엄 앞에 어머니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피학대자로 밖에는 전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가슴에만 있는 것이었을 뿐 물리적이지도 않았고 가시적이지도 않았다.
이런 얘기는 우리가 회고조로 말할 수 있는 전근대적 전설만은 아니라는 데에 우리의 아픔이 있다. 역사에서의 백년은 본질적으로 그리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역사가 흐를 만큼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볼 때 와그너의 분석과 안쓰러움은 결코 지나간 얘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아온 헐버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서구인들이 흔히 갖고 있던 백색우월주의나 비기독교도에 대한 비난이나 야만시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한국인은 인정스럽고 친근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정이 결국은 금전적 낭비의 원인 되고 때로는 허세일 수도, 나아가 노동의 신성함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므로 산업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한국인의 또 다른 특징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가족 또는 씨족 중심의 소집단 이기주의였다. 가족이 살갑게 사는 모습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한국에는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600-700년에 걸친 주자학적 가치관이 가정에서 여인의 존재를 매몰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그는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것을 우려했다. 지나친 중화사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이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하천한 계급이나 정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여인들의 문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일본이 살길을 찾아 서구의 문물과 관료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을 때 조선의 지배 계급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주자학적 중화 사상에 안주하면서 세계의 대세를 읽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원군의 쇄국(鎖國)이 당시로서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좀더 유연하게 서세동점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변용(變容)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모든 내재적 모순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외재적 요인 즉 미국의 무신(無信)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헐버트의 입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이 자신을 정복한 민족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자기 민족의 교육에 전념해야 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하여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이 국가 흥망의 열쇠이며 민족의 자존(自尊)을 회복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무라는 것은 변함없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저자는 이 책을 내면서 백색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서구인들의 시각을 통해서 한국사를 다시 해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눈에 비친 개항기 한국의 모습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바를 깨닫게 해준다는 점을 높이 샀다.

이 책은 한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해온 신복룡 교수가 개항기에 한국을 다녀간 서구인들의 한국견문기를 수집하여 직접 번역·주석한 것으로 기존에 출간된 책들과는 차별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