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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시대와 민생을 걱정한 선비의 꿈 크게보기

북학의: 시대와 민생을 걱정한 선비의 꿈

청소년 철학창고 41
저자

박제가 지음; 마현준 풀어씀

발행일

2021-01-22

면수

153*212

ISBN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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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1161727875 4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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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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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北學議)》는 북벌론이 대세를 이루던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청나라 사절단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박제가(朴齊家)가 낙후된 조선의 문물과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청나라의 발전된 기술과 제도를 상세하게 기술해 소개한 책이다. 실생활에 필요한 기구와 시설의 개선책은 물론 정치?사회 제도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서술했으며, 상업과 대외 무역의 장려를 건의했다. 청의 문물을 본받아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박제가의 주장은 북벌을 외치던 당시에는 충격이었고 혁신이었다. 윤리를 먼저 세운 뒤에야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전통적 학설과는 반대로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는 경제가 넉넉해야 올바른 윤리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쳤기에 그 파장은 컸다. 비록 명분과 허울을 중시한 일그러진 지배층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가난한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자 한 박제가의 열정과 진심은 《북학의》를 통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낡은 관습을 극복하고 사회 개혁을 이루려는 박제가의 열망은 여전히 학문을 개인의 출세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지금에도 커다란 울림을 준다. 현실적이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그의 깨어 있는 선비 정신은 현실에 안주하며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안일함을 일깨우는 경종과 같다.
‘청소년 철학창고’ 시리즈의 마흔한 번째 책으로 출간된 《북학의: 시대와 민생을 걱정한 선비의 꿈》은 원래 내편과 외편, 진소본으로 구성되어 있는 《북학의》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문에서 주제별로 발췌해 6개의 장으로 재구성하였다. 1장은 북학에 대한 논의, 2장은 제도와 풍속의 개혁, 3장은 사회 기반 시설의 개선책, 4장은 농업과 목축의 장려, 5장은 상업과 교역의 장려, 6장은 생활용품의 개선으로 《북학의》 원전이 가지고 있는 파편적이고 병렬적인 구성 방식에 일정한 체계와 명확한 분류를 부여했다. 무엇보다 원전의 본뜻을 살리되 편안한 현대어로 우리말 번역을 하였고, 어려운 용어에는 친절하게 설명을 병기했다. 발췌한 번역문 아래에는 그 글이 나오게 된 배경과 행간의 의미를 또렷하게 제시했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북학의》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과 책을 소개하여 《북학의》를 쉽게 접하도록 안내하고 있으며, 책 말미에는 박제가의 생애와 시대상, 《북학의》가 저술된 배경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 및 현대적 의미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해설을 실었다. 방대한 분량과 어려운 번역이 장벽이 되어 《북학의》를 읽으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던 일반인과 청소년들에게 주제별 내용 선별과 구성, 쉬운 번역과 각 원전 번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풍성한 해설을 갖춘 ‘청소년 철학창고’ 41번 《북학의: 시대와 민생을 걱정한 선비》를 자신 있게 권한다.


?  사회 개혁의 길을 북학에서 찾으려 한 혁명가 박제가


박제가는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로 1750년에 태어났다.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사회적 천대를 받고 가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으나 문장과 글씨는 물론 그림에도 천재성을 지닌 뛰어난 학자로 자랐다. 19세 때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 실학을 받아들이고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쌓았는데, 이들을 ‘백탑파’라 불렀다. 이들은 글 솜씨가 뛰어나 1777년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이 이들의 시를 묶어 《한객건연집》이라는 책을 출간해서 중국의 문인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박제가는 신분 제도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사상을 주장하기도 했고, 정약용과도 친교를 맺고 교유했다.
당시 조선은 왜란 때 원군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고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북벌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따라서 명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을 조천사로 부르고 청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을 연행사로 낮춰 불렀는데, 박제가는 연행사의 일원으로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다. 1차 연행이 1778년, 2차와 3차 연행이 1790년, 4차 연행이 1801년에 있었는데, 특히 1778년 처음 연행을 다녀와서 보고 들은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 《북학의》다. ‘북학파’라는 명칭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북벌’이나 ‘북학’이 다 같이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방법은 서로 반대였다. 박제가처럼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자는 입장에서는 ‘북벌’은 실천은 없고 구호로만 그친 허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으며,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당시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그래서 현실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을 한다면 양반일지라도 도태시켜야 한다는 극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학문을 오직 개인의 출세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풍토를 전면으로 비판했다. 《서경》에 ‘정덕이용후생’이라는 말이 있다. ‘정덕’이란 유교에서 추구하는 윤리적 가치인 올바르고 관용적인 행동을 말하며 ‘이용’과 ‘후생’은 백성의 풍요로운 생활을 뜻한다. 당시 전통적 학설은 정덕이 제대로 서야 이용후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는 이용후생, 곧 경제가 넉넉해야 올바른 윤리도 있게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다시 말하면 정덕을 실현하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이용후생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박제가는 정덕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정덕의 훼손도 염려했던 균형 잡힌 개혁가였다.
박제가가 1779년 6월 이덕무?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초대 검서관이 된 것은 그의 삶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개혁 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서얼들을 검서관에 발탁하는 정책을 시도한 덕분이었다. 정조를 자주 만날 수 있는 자리인 검서관 생활로 시작한 30대 이후 박제가의 삶은 희망과 좌절의 반복이었다. 1786년 정조가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라고 신하들에게 명했을 때 박제가는 《북학의》에 기초해 국가 개혁안을 과감하게 올렸는데, 어느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90년 이후 박제가는 세 차례나 더 연행에 참여했고, 중국 최고의 학자부터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인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조선 개혁에 대한 꿈도 키워 나갔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박제가의 희망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사돈인 윤가기의 역모 사건에 연루시켜 그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이로 인해 정조 사후 불과 5년 만에 박제가 역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록 신분적 차별과 사상적 급진성으로 인해 순탄한 삶을 누리지는 못 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굽힌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꿈꾼 나라는 오직 가난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이 없고 신분의 차별이 없는 풍요로운 조선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본격적으로 펼친 29세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25년여를 초지일관한 진정한 선비였다.


?  명분 대신 실리, 모순된 신분 제도 대신 부국강병을 꾀한 개혁서 《북학의》


《북학의》는 선진국 청나라를 모델로 조선의 개혁을 추구한 부국강병의 경세 방침을 제시한 책이다. 다루는 내용은 사람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부터 수레나 배, 도로와 같은 사회 기반 시설, 그리고 과거 제도와 같은 사회 제도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있다. 전체 구성은 내편(內篇)과 외편으로 나뉘어 있다. 내편은 수레, 배, 기와, 벽돌 등 39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중국에서 사용하는 일상에 필요한 각종 시설과 기구에 대한 소개 및 조선에서의 개혁안을 제시한다. 외편에는 자신의 제도 개혁에 대한 의견을 담은 평론 형식의 글이나 정책에 관한 의견 등을 실어 놓았다. 특히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논설 분야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 건의, 과거 시험에 대한 개선책, 중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교역을 주장한 글 등 17개의 항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영조가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직접 관리하던 논밭을 두어 농사에 참여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가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의 내용 일부를 발췌하고 추가로 작성하여 상소문 형식으로 올렸는데, 이 <진소본북학의> 역시 《북학의》에 수록되어 있다.
《북학의》에 담긴 개혁 방안의 핵심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북학의》는 당시 조선의 젊은 학자들에게 많은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거짓말이라 믿지 않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랑캐로만 알았던 청이 조선보다 선진 문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청의 발전된 문물을 오랑캐의 것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백성들의 가난을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배우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박제가는 피력했다.
둘째, 이용후생이다. 지금껏 덕을 강조한 조선의 풍토가 실질적으로는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일과 별개로 움직였으므로 넉넉한 삶을 만드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전 농업 기술을 배우고 원활한 유통을 위한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셋째, 자주적 통상론이다. 전통적 미덕인 검약과 소비 억제보다는 적극적 소비 활동으로 나라의 부를 늘려야 하며, 이를 위해 청과의 교역은 물론 다른 나라와도 활발하게 교역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상인과 무역상들에 대한 천대와 편견을 없애는 것부터 필요하다고 하면서, 넓게 볼 때 사농공상의 가치의 위계를 뒤엎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넷째, 국방력 강화다. 이를 위해 문벌과 당파에 휘둘리고 부패로 얼룩진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한다. 동시에 과학 기술에 바탕을 둔 무기를 개발하고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통해 정예병을 육성할 것을 강조한다.
《북학의》는 다소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조선의 현실을 냉혹하게 비판하고 중국의 문물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북학의》는 백성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수수방관하던 지식인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한 쓴소리였다. 사실 박제가의 개혁론과 자주적 통상론이 옳았다는 것은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아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  《북학의》는  왜 오늘날 의미 있는가

《북학의》는 이후 ‘북학’이라는 학문의 이름을 탄생하게 만든, 선구적이고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박제가가 《북학의》를 집필할 무렵, 서양에서는 산업 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 무렵 박제가는 동남아 등지의 상인이나 사신들을 통해 서양 세력이 엄청난 기술과 군사력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양 세계로 접근하고 있다는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과 개방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면에는 곧 닥쳐 올 국가의 위기를 예견하고 그에 대해 대비를 하고자 한 측면이 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조선 조정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기는커녕 공리공담이나 일삼는 낡은 풍조 속에서 소중화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제 역할을 방기한 채 백성들의 곤궁한 현실까지도 외면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박제가는 중국의 개방된 사회 모습과 합리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자세, 그리고 실질적인 것을 숭상하는 백성들의 생활을 보면서 진취적인 발전을 방해하는 조선 지배층의 고루함을 타파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북학의》를 통해 박제가가 진정으로 고민한 것과 그가 이루고자 한 꿈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주적이고 부강한 조국과 풍요롭고 정의롭게 사는 민초들을 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당리당략에만 빠져 국민을 위해야 하는 정치인의 본질을 잊은 지금의 정치, 보이지 않는 벽 신분 차별에 묶여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는 지금의 사회에 박제가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러 가지 사회 개혁 방안이나 국부 증대의 문제와 관련해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다 보면 박제가가 《북학의》에 담은 주장이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하는 좌표로 또렷이 빛날 것이다.